매일신문

[인간을 위한 도시 디자인] ③인도(人道)

하노버 인도 위 '붉은 선'은 관광 가이드

다정히 손을 잡은 노년의 부부가 '길'을 걷고 있다. 등에는 작은 배낭이 매달려 있다. 영락없이 둘만의 오붓한 여행에 나선 모습이다. 부부가 걷는 길 한가운데엔 붉은 선이 굵게 새겨져 있다. 붉은 선을 따라 걷는 길엔 역사와 문화, 예술이 담긴 거리 풍경이 잇따라 펼쳐진다. 인도 위에 선명하게 이어진 붉은 선을 따라가면 시내 모든 관광 코스를 찾아갈 수 있는 곳, 독일 하노버의 보행자 세상이다.

◆걷고 싶은 도시

하노버 중앙역 맞은편 관광정보센터에선 '나를 따라오세요, 빨간 선'이라는 제목의 책을 판다. 센터에서 시작해 마지막인 파자랠래 거리까지 시내 중심을 따라 이어지는 4.2㎞의 붉은 선 관광코스를 소개하는 미니 북은 모두 36개나 되는 관광 명소의 유래와 역사를 싣고 있다.

붉은 선을 따라 걸으면 말 그대로 '인간을 위한 길'이 보인다. 하노버 시내의 길은 달구벌대로의 차도와 인도를 뒤바꾸어 놓은 듯한 모습이다. 10차로 구조의 길에서 인도가 차지하는 면적은 각각 4차로 정도나 되는 반면 자동차를 위한 차도는 일방통행만 가능한 1차로나 2차로뿐이다. 이는 바로 시외는 자동차, 시내는 사람을 위해 길을 디자인한 결과다.

붉은 선의 4번째 명소, '게옥 거리'에서는 안 그래도 넓은 인도가 배로 더 넓어진다. 가로수를 심은 산책길을 인도와 연결해 놓은 때문이다. 산책길은 하노버 시민들이 추앙하는 왕, '게옥 3세'를 기리기 위한 것으로, 여름철이면 일요일 오전마다 축제가 열려 이날 하루만큼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어울려 술 파티를 한다.

◆걷고 싶은 도시를 위한 포장 디자인

붉은 선 코스의 중간쯤에서 만난 쇼핑과 산책의 명소, '크라마 거리'에선 아담한 상점들을 낀 아름다운 목조건물과 돌조각을 다닥다닥 이어 붙인 인도 포장이 수세기를 함께한 듯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곳뿐만 아니라 하노버의 모든 길에서는 건물과 스트리트퍼니처와 한데 어우러져 걷는 즐거움을 더해 주는 인도 포장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대구를 비롯한 국내에서는 도로와 맞닿은 인도에 네모난 블록만을 쓰거나 초록색, 파란색, 빨간색 등 고채도의 인터로킹 블록 일색이지만 하노버를 비롯한 유럽의 인도는 자연스러움을 강조하는 무채색의 여유가 느껴진다. 우리에게는 아스팔트 포장에 흰 선을 긋는 똑같은 횡단보도와 노면 주차장도 유럽에서는 달라진다. 역사와 전통을 간직한 거리에서는 주변 풍경에 어울리는 색깔 배합과 자연석을 사용해 걷는 즐거움을 해치지 않는다.

◆인간을 위한 길=차 없는 거리

붉은 선의 대미는 하노버 '크립케' 광장과 파자랠래 거리가 장식한다. 백화점과 고급 상점들이 밀집해 하노버의 쇼핑 천국이라 불리는 크립케는 달구벌대로를 동서남북으로 이어붙인 듯한 차 없는 거리가 끝없이 펼쳐져 있다. 크립케와 중앙역을 연결하며 지상과 지하가 얽혀 있는 파자랠래도, 마치 하늘 문을 열어 둔 동성로 지하상가를 차 없는 거리 한가운데 둔 듯한 장관을 연출하고 있다.

2시간 남짓한 4.2㎞의 붉은 선을 따라 걷는 코스를 마감하면서 '걷고 싶은 도시'와 '대구'를 다시 한번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구는 과연 걷고 싶은 도시인가.', '동성로만이라도 차 없는 거리와 인도를 더 넓힐 수는 없을까.', '전통과 문화를 간직한 대구의 골목길에도 하노버처럼 붉은 선을 그리고, 관광 책자를 만드는 일이 가능할까.'….

독일 하노버에서 글·이상준기자 all4you@msnet.co.kr 사진·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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