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이웃에 내가 좋아하는 할머니 한 분이 계신다. 할머닌 젊은 날 남편을 여의고 홀로 인생 후반기를 맞고 있는 분이다. 나이는 한 70대 초반쯤이고 건강은 괜찮다. 현재 특별한 벌이가 없어 큰딸이 보태주는 얼마 안 되는 용돈으로 생활하고 있다.
할머니와 나의 인연은 좀 별스럽다. 몇 해 전 자동차 주차를 하고 용무를 보고 있던 중 차량 옆을 지나는 할머니 한 분이 있었다. 할머닌 손수레에 버려진 파지며 고철, 그리고 좀 돈이 될 만한 폐품을 한가득 싣고 도로의 가장자리를 지나쳐 뒤뚱뒤뚱 힘겨운 걸음을 옮기고 있는 중이었다. 뭔가 불길한 예감이 확 스쳐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천천히 주차된 차량 가까이에 갔다. 살며시 차량을 살펴본 순간, 아이쿠! 운전석과 뒷문짝 부분에 뱀 꼬리 같은 선명한 흔적이 죽∼. 그래! 그렇게 나와 할머니와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흔한 인연은 아니지만 살아가면서 한 번쯤 마주칠 법한 그런 삶의 상처와 생경한 추억들이다. 그런 인연을 가진 할머니와 며칠 전 공원에서 다시 만났다.
할머니 오래간만입니다. 건강은 어때요? 그렇게 안부를 전해본다. 그러나 할머닌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그동안 주름살도 더 깊어진 것 같고 수심도 더 많아 보인다.
할머니의 아버진 일제 강점기의 고등문관이었다 한다. 그래서 그런지 자기의 어릴 적 별명은 '빨간 구두 아가씨'였다고 한다. 그 시절엔 당연히 그런 부귀와 존중을 누렸을 것이다. 그리고 20대 초반에 먼저 떠나보낸 남편을 만나 결혼을 하고 2남 1녀를 두었다. 제일 위가 큰딸이고 아래는 아들들이다. 큰딸은 현재 중소도시의 공무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서울의 명문대를 나온 큰아들은 사업에 실패 후 현재 백수다. 공무원이던 둘째아들은 사표를 내고 지금은 도시 인근지역에서 농가주택을 얻어 방갈로 영업을 하고 있다. 큰아들의 일도 있고 해서 작은아들이 사표를 낸다 할 때 할머닌 근 10여 일을 몸져누워 만류하였다 한다.
할머니의 한숨이 이어졌다. "세상, 마음대로 되지 않아. 돈도, 자식도, 그리고 무엇 하나 나와 맞지 않으면 소용없는 일이야." 한다. 맞는 말이다. 그윽한 쌍화차 향을 음미하면서 나눈 이웃 할머니와의 대화를 통해 나는 돌아보는 삶을 배운다. 그리고 세상일, 인간의 의지, 자유로운 삶을 함께 저울질해 본다.
동남풍(jaesunyoo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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