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방'은 늘 그 자리에 있었다. 매일 한두 차례씩은 대구시 중구의 약전골목을 지나가면서도 그 자리에 점방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번번이 지나친 셈이다. 담배를 사러, 혹은 껌 한 통 사기 위해 '드르륵' 알루미늄 새시로 된 미닫이 문을 열어 돈을 건네줄 때도 작은 '점방'을 지키는 노부부를 의식하지 못했다.
무덤덤하게 돈을 건네받는 할머니의 눈길에서 세월의 무게가 묻어났다. "이 점방 오래 하셨나요?" 말을 건넸다. 40년이 지났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대구시 중구 약전골목 한 가운데 자리 잡은 구제일교회 건너편 한 병원 건물에 기껏해야 1, 2평이나 될까 말까 한 작은 점방이 붙어있다. 눈여겨보지 않으면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자그마한 점방이다. 점방은 '슈퍼' 혹은 '슈퍼마켓'이라는 이름의 가게가 생겨나기 전까지는 골목 사람들의 사랑을 독차지한 만물백화점이었다. 덩치 큰 슈퍼도 대형마트가 들어서면서 부침을 거듭하는 마당에 '구멍가게' 같은 '점방'이 설 자리는 더더욱 좁아졌다. 하지만 용케도 노부부가 40년간이나 이 작은 가게를 지키고 있다.
작은 점방이라서 파는 물건은 다양하지 않다. 담배포를 겸하고 있어서 담배를 사러 오는 사람이 그중 가장 많은 편이다. 담배 외에는 초코파이와 과자류, 음료수, 초콜릿과 껌 등 먹을거리가 대부분이고 건전지와 휴지도 갖다놨다. "아, 누가 찾아오는 사람이 있어야 물건을 많이 갖다놓지. 요샌 길다니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아. 1시간에 한두 사람 보는 게 고작이고 젊은 사람은 아예 이쪽으로 오지도 않아." 골목문화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높아지면 찾는 사람이 많아질까.
가게 안에는 철제로 만든 녹슨 '돈통'이 있다. 그러나 돈통에는 천 원짜리 지폐만 가득하다. 오늘도 매상은 별로 올리지 못한 모양이다. 겨울에는 하루 5만 원어치 팔기가 쉽지 않다. 할아버지와 동갑인 권경녀(78) 할머니는 "어젠 2만 원어치밖에 못 팔았어…."라고 말했다. 여름철 사람들이 많이 다닐 때는 10만 원 이상 매상을 올릴 때도 있지만 요즘 같은 불경기에 겨울철이면 2만~3만 원이 고작이다.
▶할아버지
"이 자리에서만 40년이야. 약전골목이 인성만성일 정도로 사람이 드나들 때는 우리도 괜찮았제…."
김우집(78) 할아버지는 안경 너머로 괜찮았던 옛날을 떠올린다. 하긴 1960년대 말에 점방 주인은 그런대로 먹고 살 만한 직업이었다. 서문시장에서 장사를 하다가 쫄딱 망해서 인척이 세운 건물 한쪽을 빌려 점방을 차렸다. 그렇게 잠시 시작한 점방이 노부부의 유일한 생계수단이 되어버렸다.
"전세지만 집 있지, 먹고살 거 있지, 소일거리 있지, 아쉬운 건 하나도 없어…." 할아버지는 40년 점방 주인 생활이 어떠냐고 물었더니 이 한마디로 갈음한다.
▶할머니
할머니가 까던 호박씨를 한 움큼 건네준다. 따뜻하다. 한입 깨물었더니 고소하다. "손님이 없을 땐 가만 있으면 심심해서 이렇게 호박씨도 까고 그래."
가게 안으로 들어가 미닫이 창으로 보이는 바깥풍경을 바라봤다. 교회건물이 시야에 가득 찼고 드문드문 걸어다니는 사람들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이 창을 통해 약전골목의 40년을 고스란히 목도한 셈이다. 요샌 젊은 사람들이 담배를 많이 피우지 않아서 담배 사러 오는 사람도 별로 없다. 여름에는 더워서 하드(아이스크림) 사먹는 사람이 꽤 있는데 겨울엔 정말 사람이 없다.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누는 1시간 동안 담배 두 갑이 팔려나갔다.
"한 20년 전까지만 해도 그땐 교회(제일교회)가 있어서 오전 4시면 사람들이 오고 9시까지 시간마다 사람들이 와서 점방도 꽤 경기가 좋았어. 여름에 밖에서 냉차를 팔기도 했는데 두 통이 오후 4시면 다 팔려나갈 정도였어." 그랬다. 작은 점방이지만 한때 이곳도 펄펄 날 때가 있었던 셈이다. 돈도 적당히 벌었다.
"영감이 되는 대로 살아서 친구들하고 술을 마시러 다니고 해서 다 써버렸지."
▶다시 할아버지
할아버지가 "어허, 사람을 좋아해서 그렇지."라며 반박한다. 점방을 열기 전 할아버지는 전매청에 다녔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집에 들어오질 않았다고 할머니는 기억한다.
할아버지는 전국에 담뱃잎 수납하러 다니다가 산판도 좀 다녔다고 해명하고 나섰다. 어쨌든 그 당시 할아버지는 잘나갔다. 그러다 사업에 실패하자 이 작은 점방을 호구지책으로 차린 셈이다.
할아버지는 집으로 돌아와서도 사람을 좋아했다. 그래선가 젊을 때는 정치판에서도 이름을 날렸다. 바르게살기협의회장 등의 감투에서부터 마을금고 이사, 중앙위원에 힘있는 여당의 당원협의회장까지 도맡았다. 그는 "유수호(전직 중구 국회의원) 의원이 고향친구였지. 그래서 도와줄 수밖에 없었어."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다른 국회의원 시절에도 협의회장을 지냈다. 세상일에 관심을 떼지못하는 것이 여전한 할아버지의 습관이다.
▶노부부가 사는 법
그래도 오전 7시면 어김없이 나와서 점방문을 연다. 점방문을 여닫는 일은 할아버지의 몫이다. 그 사이 할머니는 아침을 짓고 그러면 9시쯤 들어가서 아침을 먹고 다시 나온다. 다시 낮 12시에서 2시 사이가 교대시간이다. 잠시 동안이라도 할아버지는 눈을 붙인다. 저녁에 다시 집에 들어가서 밥을 먹고 와서 문을 닫을 때까지 2, 3시간 동안 별일이 없으면 노부부는 함께 가게를 지킨다.
지난해 방광암에 걸려 대수술을 받은 할아버지는 건강이 좋지 않은 편이다. 오늘도 병원에 다녀왔다. 그래도 할아버지는 "이제 살 만큼 살았는데 이렇게라도 움직이는 게 다행"이라고 말한다. 할머니 역시 그 나이에 있을 만한 병은 다 달고 산다. 당뇨병과 심장병은 물론이고 위궤양도 있다.
권 할머니는 "이 나이에는 맛있는 것도 먹고 놀러도 다니고 세상구경하러 다니면서 편안하게 살아야 하는데 아직도 이러고 산다."며 할아버지를 흘겨보면서 한숨을 쉰다. 할머니는 가계에 보태려고 삯바느질까지 해가면서 할아버지와 60년을 열심히 살아왔지만 남아있는 건 이 작은 점방뿐이라고 했다.
"그래도 이 점방하면서 2남 1녀 다 시집장가보내고 한 세월 보내지 않았느냐. 방구들 신세를 지는 것보다는 낫겠다 싶어서 매일 여길 나오지만 세상이 예전같지가 않아…."
할아버지는 옛 영화를 떠올리는지 눈을 감았다.
글·서명수기자 diderot@msnet.co.kr 사진·정우용기자 vi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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