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시간여행

오래 전 아버지께서 막사발 몇 점과 도자기 한 점을 유산으로 물려 주셨다. 귀한 것이니 잘 간직하라며 당부까지 하셨지만 세련된 도색과 문양에 익숙해 왔던 터라 투박한 질감의 그릇들이 장독대의 옹기보다 나을 게 없어 보여 아무런 감흥 없이 창고에 넣어 보관해 두었다.

햇빛을 차단당한 아버지의 유물은 미로에 갇힌 미노타우로스처럼 유배되어 적막을 뒤집어 쓴 채 엎드려 지냈고 먼 기적소리에 귀 기울이던 나는 그 사실을 까맣게 잊고 지냈다.

며칠 전 중국 국보급 문화재 전시장을 찾게 되었다. 소설 '삼국지'를 통해 아득한 옛날 우리 인류 조상들의 삶에 경도된 적이 있었기에 수천 년 역사의 긴 터널을 지나온 옛 사람들의 흔적을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계기였다. 눈앞에 펼쳐진 유물들이 한결같이 찬연해 절로 감탄이 쏟아졌다.

꼭꼭 밀봉해 시간 속으로 밀어 넣었던 온갖 보물들이 후세에 타임캡슐처럼 개봉될 날이 오리란 걸 그 당시 사람들은 짐작이나 했을까. 역사학자 에드워드 카는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대화'라고 했다. 그의 말처럼 세월의 이끼를 덕지덕지 거느리고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게 된 유물들이 장대한 역사의 담론을 쏟아내고 있는 것이다.

2100년 전에 땅 속에 묻힌 청동술단지는 목마른 애주가의 잔을 채워줄 술이 아직 남았는지 뚜껑이 굳게 닫혀 있었다. 술단지의 청동성분이 술에 배어 우러난 오묘한 푸른빛은 가히 그 세월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과연 사람의 손길로 빚어낸 것인지 의구심이 일어날 정도로 정교하고 아름다운 조각들과 수많은 보물들이 옛 사람들의 생활 양태가 어떠했을 지를 잘 말해주고 있었다. 실크로드를 따라 외국 문물을 수입하며 현세 못지않은 화려하고 풍요로운 삶을 살았으리라. 역사 속으로 걸어 들어간 몇 시간동안 줄곧 따라다니던 생생한 충격에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옷깃으로 맨발을 덮고 엎드린 채 머리를 든 신하 모습의 한 인물상이 전시장을 관람하던 발길을 붙잡았다. 수천 년 무릎을 꿇고 평생 잠든 주인을 알현하고 있는 그의 미소에 부드럽지만 단호한 결의가 담겨 있었다. 몸을 낮춰 그와 눈높이를 마주하자 내 눈빛을 직시하며 머나먼 과거에서 현재로 이어지는 감격적인 소통을 보고나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를 묻고 있었다.

그 순간 아버지께서 물려주셨던 것들이 문득 떠올라 시간의 간격을 두고 내게로 온 유물들의 의미를 새겨보았다. 아득한 역사가 시공을 초월해 현재의 우리를 만나러 왔듯 우리 또한 미래에 무엇을 남길 수 있을 것인지 한번쯤 반문해 보아야 할 것이다.

윤미전(시인·대구한의대학교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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