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문학기행] 최인훈의 <광장>②

역사의 커다란 물줄기에 몸을 맡기고…

의 현재는 항해 이야기이다. 반공 포로 석방이라는 전쟁의 마무리는 명준으로 하여금 '중립국'이라는 새로운 공간을 택하게 한다. 사실 명준에게는 북한과 남한 어디에도 자신의 광장은 없었던 셈이다. 명준은 중립국 인도로 가는 타고르호를 타게 된다. 새로운 세계에 대한 기대와 아울러 자꾸 자기를 엄습하는 또 다른 불안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던 명준이 택하는 것은 결국 자살이다. 그래도 항해는 계속된다. 명준은 그런 사람이다. 자신의 유무에 의해 역사의 커다란 물줄기가 변하지 않는 그러한 평범한 사람이다. 역사의 커다란 물줄기에 몸을 맡겨 살아가는 인물, 그래서 너무나 평범한 인물, 그러나 그것이 바로 역사의 주체임을 역사는 말하고 있다. 그들은 다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은 바로 평범하지 않은 역사를 살았던 평범한 우리의 이야기다.

4·19혁명이 일어났던 1960년은 소설가 최인훈의 해이기도 했다. 전후에 발표된 가장 의미 있는 작품 중의 하나인 이 그해 10월 《새벽》이라는 잡지에서 뜨거운 목소리를 담고 세상에 나온 것이다. '남쪽에는 밀실만 있고 북쪽에는 광장만 있을 뿐'이라는 주인공 명준의 말은 4·19혁명이 가져다준 자유의 공기를 감안하더라도 당시로서는 충격적인 발언이 아닐 수 없었다.

1999년 떨리는 마음으로 아이들과 함께 처음 방문했을 때 거제도 포로수용소에는 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양철로 만들어진 조잡한 기념관과 몇 개의 유적, 비가 내리는 포로수용소 유적지는 초라하다 못해 을씨년스러웠다. 찾아오는 사람도 거의 없는 듯했다. 하지만 2005년 선생님들과 다시 방문한 포로수용소는 거제도 종합 관광단지 개발과 더불어 이미 유명한 관광 명소로 바뀌어 있었다. 새롭게 조성된 여러 개의 다양한 기념관과 당시의 모습을 복원한 구조물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입장료도 받고 있었고 모두 관람하는 데 거의 두 시간이 걸렸다. 역사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 그런데도 오히려 지난날 수용소의 모습이 훨씬 가슴에 남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겉으로 보이는 풍경은 오히려 껍데기에 불과하고 결국 그 내면의 풍경까지 바꾸지 못한다는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일까?

광장에서 졌을 때 사람은 동굴로 물러가는 것. 그러나 과연 지지 않는 사람이라는 게 이 세상에 있을까. 사람은 한 번은 진다. 다만 얼마나 천하게 지느냐, 얼마나 갸륵하게 지느냐가 갈림길이다.(중략) 나는 영웅이 싫다. 나는 평범한 사람이 좋다. 내 이름도 물리고 싶다. 수억 마리 사람 중의 이름 없는 한 마리면 된다. 다만, 나에게 한 뼘의 광장과 한 마리의 벗을 달라. 그리고, 이 한 뼘의 광장에 들어설 땐, 어느 누구도 나에게 그만한 알은 체를 하고, 허락을 받고 나서 움직이도록 하라. 내 허락도 없이 그 한 마리의 공서자를 끌어가지 말라는 것이었지. 그런데 그 일이 그토록 어려웠구나. (최인훈, 부분)

사람은 누구나 진다. 영웅도 싫다. 단지 한 사람의 공서자만 필요할 뿐이다. 하지만 명준에겐 그 일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배 뒤를 따르던 갈매기가 아픈 역사가 앗아가버린 자신의 유일한 공서자(은혜)임을 확인한 순간 명준은 우리 곁을 떠났다. 명준의 자살은 어떤 의미일까? 한 사람의 지식인이 자신의 어깨를 누르는 이데올로기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절망한 결과일까? 사실 명준은 남한과 북한이라는 이질적인 이데올로기를 지닌 나라를 모두 부정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이 단지 이데올로기의 대립만을 다룬다고 볼 수는 없다. 명준은 그 대립으로 인해 비워진 공간에 사랑이라는 꽃을 피운다. 작품 곳곳에서 작가는 명준의 목소리를 통해서 사랑이라는 주제를 강화하고 있다. 이데올로기라는 극단적인 대립을 해소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도 결국 사랑밖에 없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한준희(경명여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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