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시와 함께-이홍섭 作 '터미널'

젊은 아버지는

어린 자식을 버스 앞에 세워놓고는 어디론가 사라지곤 했다

강원도 하고도 벽지로 가는 버스는 하루 한 번뿐인데

아버지는 늘 버스가 시동을 걸 때쯤 나타나시곤 했다

늙으신 아버지를 모시고 서울대 병원으로 검진 받으러 가는 길

버스 앞에 아버지를 세워놓고는

어디 가시지 말라고, 꼭 이 자리에 서 계시라고 당부한다

커피 한 잔 마시고 담배 한 대 피우고

벌써 버스에 오르셨겠지 하고 돌아왔는데

아버지는 그 자리에 꼭 서 계신다

어느새 이 짐승 같은 터미널에서

아버지가 가장 어리셨다

버스 노선의 맨 끝 지점이 터미널이다. 터미널은 그러나 종점이자 출발점. 천 갈래 만 갈래 길이 터미널에서 시작되고 끝이 난다. 내 삶의 터미널에 젊은 아버지가 계셨다. 교각처럼 튼튼한 종아리와 코끼리처럼 듬직한 등판. 아버지가 옆에 서 계시면 세상 무서운 게 없었다.

그러나 상황은 역전됐다. 기다리는 자와 기다리게 하는 자의 위치가 바뀌었다. 터미널은 아버지와 내가 바통터치 하는 곳. 아버지의 나이를 빼내어 내 나이를 채웠으며 나이를 덜어낸 아버지는 이윽고 어린애가 되셨다. 기다리는 일밖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아버지. 날마다 어려져서 마침내 오셨던 그곳으로 가실 것이다. 터미널로 아주 돌아가실 것이다.

장옥관(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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