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가을 대구오페라축제의 여운이 세모의 길목을 굽이돌아 흐르고 있다. 많은 시민들이 오페라의 감동에 빠져들고 가수들의 열정에 환호했던 그 기억이 새삼스럽다. 이 즈음 불멸의 오페라 가수들을 떠올리며 겨우내 오페라의 감흥에 다시 젖어본다. 윤성도(시인·전 동산병원장) 계명대 의대 교수의 오페라 이야기 시리즈를 마련했다. '오페라의 도시' 대구에서, 오페라 마니아로 전문가보다 더 전문적이라는 평을 얻고 있는 윤 교수와 함께 한 세기 전에 활약했던 불멸의 오페라 가수들의 에피소드와 삶과 음악을 만나본다.
좋은 테너는 한 세기에 몇 나타나지 않는다. 20세기 최고의 테너 베냐미노 질 리(1890-1957)가 산타 체칠리아 음악원을 졸업하고 파르마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했을 때 심사를 맡았던 알렛산드로 본치(Alessandro Bonci·1870~1940) 는 "우리는 드디어 테너를 찾았다."고 탄성을 질렀을 정도다.
녹음으로 남아 있는 테너의 원조는 엔리코 카루소(1873~1921)와 타마뇨(1850) 데 루치아(1860) 등이다. 본치는 제나텔로(1876) 안셀미(1876)와 더불어 테너 제1세대로 분류된다. 본치가 활약하던 시기는 벨칸토와 베리스모가 혼조양상을 보이던 때였다.
에디슨 회사에서 녹음한 에디슨 3인방(본치·안셀미·모이카)에도 속하며, 벨칸토 창법을 지킨 가수이다. 그는 가난하여 어릴적에는 구두제화 견습공이었다. 우연한 기회로 한 달에 9달러 정도의 장학금을 받고 9마일 떨어진 페사로 로씨니 음악원에 걸어다녀야 했다.
1896년 파르마에서 베르디의 '팔스타프' 출연을 시작으로 다음 시즌 라 스칼라에 벨리니의 '퓨리타니'로 입성한다. 1906년 12월 3일 뉴욕 맨해튼 가극장과 계약 당시 메트로폴리탄에서 인기 절정에 있던 카루소와 대결하게 된다. 1914년 시카고 가극장에서 노래하다 세계 제1차 대전 중 참전한 다음 다시 '메트'와 시카고에서 노래를 불렀다.
리릭 계열 테너이며 벨칸토를 구사한 그는 당시 오페라 황금기(19세기 말~20세기 초) 대중의 요구와 일치해 대성공을 거두었다. 특히 벨리니·도니젯티·마이어베어 오페라의 맑고 뜨거운 벨칸토 음색과 대중들이 원하는 표현과 호흡조절·억양조절을 잘하도록 훈련을 받았던 것이다. 1890년대 나타난 베리스모 오페라도 잘 소화해 새로운 것을 갈망하는 대중들을 다시 사로잡게 되었다.
오페라 내용은 멜로 드라마와 같고 울림이 큰 성량과 거친 표현, 소리를 과장하거나 길게 뽑는 표현으로 바뀌어 올드 벨칸토 창법은 빅토리아 시절의 유물처럼 되고 말았다. 본치의 노래를 들어 보면 마치 겨울철 사시나무 떨듯 특이한 비브라토의 음성을 당장 알 수 있다.
에디슨도 처음 만난 본치의 음성을 테스트 해보고 떨리는 음성이 거북해 일단 그를 광고용 레코드 가수로만 쓰려고 했지만 의외로 대중의 인기가 높아 정식 계약을 했다. 늘 카루소와 필적할 가수를 물색하던 에디슨은 본치 때문에 많은 레코드 판매 실적을 올렸다. 카루소가 1910년 이후 드라마틱 테너로 변신한데 비해 그는 계속 벨칸토 레퍼토리를 고수했다.
윤성도 계명대 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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