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목요 시조산책-오승철 作 '겨울 귤밭'

귀한 것일수록

버리는 마음가짐

눈 내린 날은 장끼도

터를 잡고 우는데

외면코 등을 돌리면

하늘 끝에 머무는 노을.

머물지 못하는 세월

나뭇잎 흔들고 갔다

바다 가까운 담밖에

지치도록 쳐든 가지

오늘밤 뉘 무덤가에

별빛 한창 푸르겠다.

겨율 귤밭은 말 그대로 '텅 빈 충만'입니다. 이미 황금의 결실을 다 거둔 풍경 위로 내리는 눈. 그 눈 위에 터를 잡고 우는 장끼 소리가 짧은 경구처럼 겉귀를 때립니다.

노을은 하늘 끝에나 머물지만, 세월은 한순간도 머물지를 못합니다. 속절없는 세월이 흔들고 간 나뭇잎에 잔양만이 부실 뿐.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으면서 남아 있는, 그것이 다름 아닌 세월의 자취인 것을.

무언가 막막한 생각이 들 적마다 한사코 바다 쪽으로 구부러지는 돌담. 구부러지는 돌담 밖, 지치도록 쳐든 가지 끝에 별빛이 모입니다. 제주섬 중산간 곳곳에 흩어진 돌무덤들이 보낸 별빛. 무연고의, 그 푸른 별빛이 곧 절대 자연의 눈짓입니다.

시인은 제주섬에서 나고 자라 줄곧 그곳에서만 삽니다. 이십 대 초반 이 작품을 들고 신춘의 벽을 넘었으니, 어언 서른 해 가까운 세월입니다. 말 더듬듯 말 더듬듯 머뭇대는 제주 바닷가, 겨울 귤밭 같은 세월입니다.

박기섭(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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