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 문화가 점점 바뀌고 있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몇 년 새 우리 문화 깊숙히 침투한 파티 문화. 지난 8일 열렸던 대구와인클럽의 5주년 기념 파티 현장. 인터불고 연회장을 가득 메웠던 150여명의 동호회원들은 이날 와인잔을 부딪히며 색깔있는 연말행사를 즐겼다.
◇'로망'을 실현하다
이날의 드레스 코드는 여자는 이브닝 드레스, 남자는 턱시도. 남들의 이목을 끄는 것을 쑥쓰러워하는 보수적인 지역정서 상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장 차림으로 참석했지만 화려하게 떨쳐입고 나타난 멤버들도 객석 곳곳을 채우고 있었다. 여성 회원 중 30여명이 웨딩업체에서 대여한 이브닝 드레스로 한껏 멋을 냈고, 남성회원 대여섯명도 리본 넥타이를 메고 턱시도를 차려 입고 있었다.
사실 일반인들이 맞추기에는 너무나 까다로웠던 드레스 코드. 하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꽤나 긍정적이었다. 점잖게 정장 차려입고 온 참석자들까지도 '내년에는 나도 한번!'이라며 용기백배 했을 정도.
이날 짧은 커트머리에 검은색 드레스를 코디해 '베스트 드레서'로 뽑혔던 양귀순(35·여·닉네임 민짱)씨는 "결혼식을 치른 후에는 내 생에 이런 날이 다시 올 줄 꿈에도 생각 못했다."며 "아줌마가 드레스를 입는다는 것이 상당히 쑥쓰럽기도 했지만, 여자들에게 드레스를 입고 한껏 멋을 내는 것만큼 제대로 기분을 전환시켜 줄 수 있는 기회도 잘 없을 것"이라고 좋아했다.
하얀색 미니 드레스로 멋을 낸 서정향(29·여·닉네임 코코샤넬)씨는 "여성들에게 드레스를 입는다는 것은 어릴적부터 꿈꿔왔던 '로망'을 실현하는 것"이라며 "TV에 등장하는 연예인들이나 입는 옷이라고 생각했던 드레스를 직접 입고 내 인생의 완벽한 주인공이 되는 기분은 예상했던 것보다 더욱 멋졌다."고 했다.
보수적인 대구 남성들마저도 '턱시도 입는 것이 생각보다 괜찮다.'는 반응. 처음으로 나비넥타이를 매 봤다는 박준석(34·닉네임 자기야)씨는 "길게 늘어지는 넥타이에 비해 활동하기도 편하고 목이 졸리는 느낌이 적어 좋다."며 "소심한 성격탓에 검은색 턱시도를 골랐지만 장가갈 때는 좀 더 돋보이는 턱시도를 입어야겠다는 생각도 하게됐다."며 웃었다.
◇함께 어울리기 좋은 시간
'와인'을 매개로 인연이 이어지다보니 이날 모인 사람들은 20대부터 60대까지 연령대도 다양했다. 나이 지긋해보이는 중년의 아저씨들도 곳곳에 눈에 띄었고, 나이 꽤나 들어보이는 여성 참석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는 '세대차'가 없다. '와인'이라는 공통의 관심사가 나이를 뛰어넘어 이들을 한데 묶어줬던 것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곳 저곳의 테이블을 옮겨 다니며 서로 인사를 나누었고, 잔을 부딪혔다.
박훤태(47·닉네임 포토향)씨는 이날 행사 덕분에 '파티 마니아'가 됐다. 늘 폭탄주만 돌려대는 송년회 뿐이었던 박씨에게 이날의 파티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와인을 마시면서 처음으로 파티 문화를 접하게 됐다는 박 씨는 "술이나 마시는 일반적인 송년회 자리보다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이 파티 문화의 장점"이라며 "파티라는 형식이 없었다면 나 같은 중년의 아저씨가 20, 30대 젊은이들과 서스럼없이 어울릴 수 있는 자리가 만들어질 수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동호회 회원들이 부족한 솜씨지만 하나씩 장기를 선보이는 덕분에 자리는 좀 더 흥겨워질 수 있었다. 피아노, 성악, 가야금, 플룻, 섹소폰 등의 솜씨를 선보이면서 술잔을 돌리지 않아도 지루하지 않은 시간이 이어졌다.
이날 파티 사회를 맡았던 박용운(30·닉네임 사바나)씨는 "그 어떤 모임이 6시간 동안 150여명 모두가 지루하지 않게 한데 어우러질 수 있겠냐"며 "파티 형식을 통해 서로가 최소한의 '선'을 지키려는 노력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했다.
◇그래도 '흥'만은 우리식으로!
처음 시작은 와인잔을 살짝 치켜들고 건배를 나눈 후 와인에 대한 상식 등을 이야기 하는 등 상당히 무게있는 분위기였던 이날 파티. 하지만 시간이 흘러 마시는 와인의 양이 늘어가면서 조금씩 왁자지껄해지더니 시노래패의 공연에 이르러서는 장내 분위기가 급반전됐다.
7080 노래들이 연이어 쏟아지자 하나 둘 나와 흥겹게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나 싶더니 곱게 드레스 떨쳐입은 아줌마들까지 앞으로 나와 치마를 걷어잡고 춤을 추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기차놀이까지 한다. 어느 누가 시작했는지 모르지만 회원들 수십명이 어깨에 손을 얹고 음악에 맞춰 객석을 이리저리 휩쓸고 다녔다.
사실 이날 파티 현장을 남들이 봤다면 욕을 할 수도 있을 법하다. "웬갖 폼 다 잡더니 시장판일쎄~. 우아한 파티장에서 막춤에 기차놀이라니…." 하지만 여기는 한국이지 서양이 아니지 않은가. 서양 사람들이야 파티장에서 왈츠를 췄겠지만 우리는 흥에 겨우면 서로 손 부여잡고 덩실덩실 춤을 출 수도 있는 일이다.
서울 태생으로 대구에 내려온 지 이제 2년이 됐다는 구희인(34·닉네임 Ryne)씨 "파티라는 서양식 문화를 빌려왔다고 해서 모든 것을 서양식으로 맞출 필요는 없는 것 아니냐?"며 "분위기가 무르 익을수록 솔직하고 직선적이며 끈끈한 정이 넘치는 대구 사람들의 정서가 표출돼 더욱 좋았던 자리"라고 했다. 조정희(33·여·닉네임 은빛냥이)씨 역시 마찬가지 생각. 공동 진행을 맡았던 그녀는 "처음에는 너무 시장판 분위기로 가는 것 같아 잠시 당황하기도 했지만 연말 송년회는 모두가 함께 흥겨울 수 있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라며 "박수를 치고, 손을 맞잡고 춤을 추며 공연하는 사람들을 응원하는 것도 우리의 방식이 아니겠냐"고 했다.
오후 5시에 시작했던 이날 행사는 결국 밤 11시가 넘어서야 끝이 났다. 아마추어들의 모임인 탓에 행사 진행이 미숙해 준비했던 모든 프로그램들을 선보이진 못했지만 150여명의 참석자 전원이 무려 6시간 동안이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이날 행사는 모든 참석자들이 둥글게 원을 만들고 서로 와인 잔을 부딪혀 인사를 나눠가며 해바라기의 '사랑으로'를 부르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사진·정우용기자 vi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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