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온정의 손길이 그리워지는 계절이다. 그러나 치열한 대선을 치른 탓인지 구세군 자선냄비는 사람들의 눈길을 받지 못하고 있다. 자선냄비 모금액도 예년 수준에 못 미치고 있다. 세상이 각박해진 건지 '사랑의 온도계'는 꿈쩍을 하지 않고 있다.
이 겨울, 온정의 기온은 몇 도나 될까? 직접 구세군 자원봉사자로 참여, 사랑의 종을 잡았다. 빨간 자선냄비와 함께 "땡그렁 땡그렁~" 마음을 울리는 사랑의 종소리가 울려퍼지는 대구 도심 동성로, 그 낯익은 연말풍경 속으로 풍덩 뛰어들었다.
#주말인 지난 15일 오후 대구시 중구 동성로 한일극장 앞은 주말을 즐기러 나온 시민들과 청소년들로 북적거렸다. 서툴게 사랑의 종을 흔들었다. 예상과 달리 사람들은 자선냄비를 애써 외면하거나 바쁘게 오가기만 했다. 10여 분 만에 엄마 손을 잡고 나온 아이가 고사리손으로 동전을 내놓았다. 그리고는 총총걸음으로 먼발치에서 지켜보던 엄마에게 달려간다. 그제서야 사람들은 하나 둘씩 주머니 속에서 꼬깃꼬깃한 작은 정성들을 내보이기 시작했다. 종을 울리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메리 크리스마스"를 외치는 목소리도 커졌다. 음식배달을 갔다 오는 듯한 한 아저씨가 빈그릇 안에 든 천 원짜리 지폐 한 장을 집어 냄비 속으로 던지듯 넣고는 사라졌다. 어른들은 자선냄비를 피해가거나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더 많다. 그런데 아이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래선가 자선냄비에는 고사리손이 더 많았다. '마음씨가 천사처럼 착한 아이들이 많은가 보다.'라고 생각했다가 이쯤에서 '아이들은 원래 착하다.'는 쪽으로 생각을 바꿨다.
1시간여 전에 자선냄비를 지나치지 않고 1천 원씩을 넣고 갔던 이혜정, 강민경 어린이(남대구초교 5년)가 다시 나타나 주머니를 뒤져 동전을 다 털어넣고는 인파 속으로 쏜살같이 사라졌다. "선물사러 나왔다가 남는 돈을 다 넣었어요. 다른 사람 도와주면 좋잖아요." 민경이는 "기분이 좋아요. 다른 사람을 도와줬다고 생각하니까요."라고 말했다.
이 아이들처럼 용돈을 아껴서 자선냄비에 기부하는 청소년들이 많았다.
박민정(효성여중 1년) 양은 "돈은 아깝지만…."이라면서도 "그냥 뿌듯하고 좋아요."라고 말했다. 같은 학교에 다니는 구희주 양도 "가난한 사람을 도와줄 수 있어서 행복해요."라면서 "앞으로도 기회가 되는 대로 다른 사람을 도와주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구세군 박병규 사관은 "아직도 기억에 남는 기부자가 있는데 매년 이맘때쯤이면 아이들과 함께 1년 동안 저금한 저금통을 들고와서 자선냄비에 넣고 가는 사람이 있다."면서 "그런 장면을 보면 부모들이 참 훌륭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박 사관은 "아이들에게 무엇보다 소중한 '다른 사람을 사랑하라.'는 삶의 지혜를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자원봉사자 류필기(60·여) 씨는 해마다 자선냄비 지킴이로 활동하고 있다. 류 씨는 "구세군이 뭔지 사람들이 잘 모르면서도 연말이면 나타나는 자선냄비에는 인색하지는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요즘 자선냄비 자원봉사자 모집이 예년같지 않은 모양이다. 일반인들이 줄어드는 대신 학생들이 많아졌다. 그녀는 "매년 한 번씩 이 자리(동성로 입구)에 와서 거액을 헌금하고 가는 할머니가 있었는데 보이질 않는다."며 "혹시라도 건강이 안 좋아진 건 아닌지 걱정된다."고 덧붙였다. 대부분 동전이나 소액지폐를 넣고 가지만 간혹 1만 원짜리 지폐를 넣거나 10만 원 이상의 수표를 넣고가는 사람도 있다. 대구에는 100만 원짜리 수표를 기부하는 사람이 있었지만 지난해부터 보이질 않았다고 한다.
#이때 유니폼을 입은 한 떼의 직장 여성들이 찾아와서 두툼한 봉투를 하나 넣고 갔다. 인근에 있는 한 성형외과 직원들이었다. 갓 수술을 한 듯 수술복 위에 외투를 걸쳐 입은 의사도 함께 왔다.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구세군 자선냄비의 종소리가 들려서 외면할 수 없었다."고 했다. 서혜은(27·상담실장) 씨는 "지하철역에서 노숙자나 걸인을 보면 되돌아가서라도 동전을 털어주고 온다."며 "내가 가진 것을 조금이라도 나누면 마음이 편해지는데 이런 것이 '나눔의 철학'아니냐."고 반문한다. 그녀는 "우리가 기부하는 돈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제대로 쓰였으면 좋겠다."며 "우리가 자선냄비에 다녀가고 나서 더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것 같아서 기분이 상쾌해졌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구세군은 겨울에 반짝 나오는 '세상을 구하는 군대'아니냐."고 말했다.
이 병원의 이경호 원장은 "매년 병원 수익금의 일부를 정기적으로 자선기금으로 후원하는 방안도 찾아보고 있다."고 말했다.
자선냄비 기부는 이제 인터넷으로도 가능해졌다. 몇몇 시중은행 홈페이지에는 자선냄비에 인터넷으로 후원할 수 있도록 계좌를 개설해뒀다. 연말뿐 아니라 매달 후원할 수도 있다. 도심에서뿐 아니라 인터넷에서는 연중 자선냄비의 사랑의 종소리가 울리고 있는 셈이다.
글·서명수기자 diderot@msnet.co.kr 사진·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 지역 27곳 설치…1억7천만원 목표
▶구세군 자선냄비는?
1891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처음으로 시작됐다. 추운 겨울 어느 날 배 한 척이 난파당했다. 그러나 불황기였던 당시 시에서는 난파선을 도와줄 예산이 부족했고 난민들은 추위와 굶주림에 떨어야 했다. 그때 구세군 사관 조셉 맥피(Joseph Mcfee)는 영국 리버풀 부둣가에 놓여 있던 자선을 위한 '심슨의 솥'을 기억해냈고 그 다음날 시당국으로부터 오클랜드 부둣가에 솥을 걸어도 좋다는 허가를 받아 모금을 시작했다.
▶한국에서는?
1928년 당시 한국구세군 사령관이던 선교사 박준섭 사관이 서울 도심에 냄비를 설치하고 불우이웃돕기 거리모금을 시작한 것이 처음이었다. 현재 구세군 자선냄비는 매년 12월 초순부터 크리스마스 이브인 24일 자정까지 전국의 주요 도심에 설치돼 모금활동을 하고 있다. 평일에는 오후 1시부터 오후 7시까지 주말에는 오후 9시까지 모금활동을 한다. 모금실적이 떨어지면 시간을 조정하기도 한다.
▶대구·경북 지역에선?
대구시내 10여 곳을 비롯해 27곳에 자선냄비가 설치돼 있다. 대구 2·28기념공원에는 대형 자선냄비가 설치돼 있다. 대구에서 모금이 가장 잘 되는 곳은 동성로 입구와 대구백화점 앞. 구세군 자선냄비의 올해 총 모금목표는 31억 원, 대구·경북지역에서는 1억 7천만 원 정도가 목표액이다. 구세군은 자선냄비를 통한 기부금으로 불우이웃과 소외계층을 위한 다양한 지원프로그램을 운영한다.
▶구세군은?
1865년 감리교 목사였던 윌리엄 부스(William Booth)가 영국 런던의 슬럼가에서 창립한 기독교의 한 종파다. 구세군 대한본영에 따르면 부스는 많은 가난한 사람들과 근로자들이 교회로부터 배척되던 시절에 모든 계층의 사람들에게 보다 가깝게 다가갈 수 있는 교회를 만들기 원했다. 그래서 그는 '기독교선교회(The Christian Mission)'로 알려진 단체를 1878년 '구세군(The Salvation Army)'이라는 명칭을 채택했다. 대구·경북에는 31개의 구세군교회가 있고 등록교인수는 1만여 명이다.
서명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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