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끝난 '2007 경주세계문화엑스포'. 여러 볼거리가 많았지만 '경주타워'를 첫손에 꼽는 사람들이 많았다. 경주타워는 몽고 침입 때 불길에 휩싸여 역사 속으로 사라진 황룡사 9층 목탑을 음각으로 형상화해 화제를 모았다. 또 이곳을 무대로 영상과 조명, 불꽃, 음향 등이 한데 어우러진 첨단멀티미디어쇼가 펼쳐져 관람객들의 시선을 사로잡기도 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데 정신적 구심처가 된 황룡사처럼 우리 역사를 돌아보면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진 사찰들이 적지 않다. 폐허가 된 절터에 서면 사라진 것에 대한 아련한 마음과 더불어 세월의 무상함을 절절하게 느낄 수 있다. 한 해가 마무리되는 무렵, 가야산 자락에서 융성했던 법수사를 찾아나선 이유도 사라진 것에 대한 아쉬움을 달래는 것은 물론 폐사지를 통해 흐트러진 마음을 다잡기 위해서다.
가야산을 대표하던 대가람!
성주군 수륜면 소재지에서 경남 합천으로 가는 59번 국도를 따라가면 백운동 중기마을이 나온다. 사라진 절터에 마을이 들어서 중기(中基)란 마을 이름이 붙었다. 지금도 절터를 중심으로 백운리 골짜기 곳곳에 석탑, 돌기둥, 주춧돌 같은 유물이 사방에 퍼져 있다.
가야산 남서쪽에 있는 해인사와 더불어 남동쪽에 있던 법수사(法水寺)는 가야산을 대표하는 대가람이었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법수해인사'란 문구를 근거로 제수천 전 성주문화원장 등은 법수사의 창건 시기를 서기 802년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 성주읍지(星州邑誌)인 '경산지 불우조(京山誌 佛宇條)'엔 "법수사엔 구금당(九金堂) 팔종각(八鐘閣) 등 무려 1천여 간이 넘는 건물이 있었다. 사찰에 딸린 암자만도 100개가 넘었다."고 기록돼 있다. 해인사에 못지 않았던 법수사의 방대한 규모와 그 영향력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백운동을 지나는 59번 국도에서 차를 멈추고 동쪽으로 20여m를 가면 법수사지 3층 석탑이 있다. 절이 창건될 당시에 같이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되는 탑이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86호로 지정된 이 탑은 2개의 기단과 3층의 탑신, 그리고 머리장식으로 구성돼 있다.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탑의 높이는 약 6m.
탑의 지붕돌은 완만한 곡선에 네 귀퉁이가 추켜 세워져 있어 그 중량감에 비해 무겁지 않은 느낌을 준다. 안타깝게도 상륜부(相輪部) 노반(露盤·머리장식 받침돌)은 깨어져 있다. 1층 기단에는 각 면마다 3개씩의 연화무늬가 새겨져 있고, 받침돌 몸돌은 그나마 상태가 양호하다. 지붕돌 네 모서리마다 풍경을 달기 위해 구멍을 뚫어놓은 흔적이 있다.
법수사지 3층 석탑은 탑 자체로도 아름답지만 가야산과 함께 어우러져 더욱 멋스런 자태를 뽐낸다. 탑 서쪽으로 만물상, 상아덤~돈봉, 그리고 동성봉~바래봉 능선 등 가야산의 빼어난 절경이 병풍처럼 둘러싸 탑을 감싸안고 있다. 어둠이 깔릴 무렵 법수사지 3층 석탑 앞에 서면 1천여 년의 세월을 거슬러 오르는 '시간여행'을 떠날 수 있다.
사라진 것에 대한 그리움!
3층 석탑에 이어 옛 법수사의 영광을 되돌아볼 수 있는 곳이 대웅전지 석축이다. 높이가 7, 8m에 이르는 석축은 크고 작은 돌을 맞물려 쌓아 올렸다. 아귀가 절묘하게 맞는 석축을 바라보면 자연스럽게 장인의 솜씨가 느껴진다. 경주 불국사의 석축도 빼어나지만 사라진 사찰, 법수사의 석축도 그에 못지 않게 아름답다.
석축에 이어 중기마을로 가 법수사지 당간지주를 찾았다. 당간지주는 요즘말로 하면 깃발 게양대다. 옛날 절에서는 깃발을 세웠는데 기를 높이 세우기 위해서는 장대가 필요하고, 그 장대를 고정시키는 것이 필요한데 그게 바로 당간지주(幢竿支柱)다. 당이란 부처님이나 큰스님의 얼굴을 그려놓은 그림을 말하고, 그 당을 받치는 것이 당간이란 게 제 전 성주문화원장의 얘기다. 당간지주의 크기는 그 절의 크기와 위용을 나타내는 것으로 지금의 법수사 당간지주를 통해 우리는 옛날 법수사를 그려볼 수 있다.
법수사지 당간지주는 높이 3.7m, 폭 7.4m, 두께 51cm다. 장방형의 석주 2개가 서로 마주보고 있다. 양 지주는 거의 손상없이 보존됐는데 지주가 기울어 간격이 다소 벌어져 있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87호인 이 당간지주는 우아하고 단아한 모습을 지녀 당간지주 계보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타다 남은 촛불과 작은 제단이 있는 것으로 미뤄 당간지주는 요즘에도 마을 주민들의 기도처가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융성하던 법수사는 임진왜란을 겪고 조선 중엽에 폐사가 되고 말았다. 그 이후 사찰에 있던 비로자나불 등 유물도 뿔뿔이 흩어졌다. 주존불인 비로자나불은 해인사로 옮겨졌고, 법수사 절터 뒤편 용기골로 들어가는 어귀에 자리 잡은 미륵당 불상은 1967년 경북대학교로 모셔졌다. 보물로 지정되고도 남을 만한 법수사 배례석은 인근 식당 마당에 쓸쓸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
다시 법수사 3층 석탑 앞에 섰다. 어둠에 묻힌 탑과 그리고 가야산을 바라보며 성주 출신으로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인 형재(亨齋) 이직(李稷)이 남긴 '등법수사남루(登法水寺南樓: 법수사 남루에 올라)'란 시를 떠올려본다.
'예전에 한 번 오른 적이 있고, 오늘 다행히 거듭 오른다. 두 손 마주 잡고 읍을 함은 기이한 경관이 모여 있기 때문이요, 쉬이 떠나지 못하고 주저함은 고의(古意)가 깊기 때문이네. 시냇물은 돌 절벽에 놀라고, 빗(雨) 기운은 먼 멧부리에서 나온다. 뜻이 통하는 스님 친구가 있어서 근심이 있을 때 더불어 시를 읊조릴 만하네.'
글·이대현기자 sky@msnet.co.kr 박용우기자 ywpark@msnet.co.kr 사진·박노익기자 noik@msnet.co.kr
댓글 많은 뉴스
[정진호의 매일내일(每日來日)] 3·1절에 돌아보는 극우 기독교 출현 연대기
이낙연 "조기 대선 시, 민주당은 이재명 아닌 다른 인물 후보로 내야"
김세환 "아들 잘 부탁"…선관위, 면접위원까지 교체했다
野, '줄탄핵'으로 이득보나…장동혁 "친야성향 변호사 일감 의심, 혈세 4.6억 사용"
尹공약 '금호강 르네상스' 국비 확보 빨간불…2029년 완공 차질 불가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