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윤성도의 오페라 이야기] ③미겔 플레타

훌륭한 음성 가졌으나 무절제한 생활로 불행한 말년

플레타는 좋은 테너 음성을 가졌음에도 무절제한 생활로 말년을 불행하게 보내고 요절한 스페인 명가수이다. 같은 스페인 출신 후배 테너 알프레도 크라우스(1927~1999)가 플레타를 회상하는 장면이 있다. 그는 40세 때 이른 죽음을 맞았지만 활동기간(1916~1935) 동안 가장 위대한 테너였다. 그의 음성은 유연하고 풍부하며 음역의 폭이 넓다. 소리를 곱게 내는 '메사 디 보체'나 '피아니씨모'가 특징이며 고음역에서 길게 끄는 것을 볼 수 있다.

미겔 플레타는 1897년 12월 1일 스페인 후에스카에서 태어났다. 11세 때 도레미 계명을 외우며 시골 공장에서 일했다. 20세 때 사라고사에서 열린 콩쿠르에 참가, 입상하진 못했으나 음성은 좋다는 칭찬을 받았다. 이어 바르셀로나 음악원에 오디션 신청을 넣었으나 남성 클래스에 빈자리가 없어 거절당했다. 수소문 끝에 루이자 피에릭 여선생을 알게 되어 여성 클래스에서 성악을 배웠다. 피에릭은 젊은 플레타가 유망하다고 보고 그에게 이태리어, 불어 등을 공부하게 하고 교양을 높여 주었다.

1919년 음악원을 졸업하고 피에릭의 강요로 밀라노로 가게 된다. 이미 두 사람은 사랑에 빠져 유부녀인 피에릭은 남편을 버리고 플레타와 결혼하게 된다. 그해 10월 트리스테의 가극장과 계약하고 12월 잔도나이의 로 데뷔한다. 그러나 반응은 다소 냉랭했다.

1920년 1월 공연 이후부터 인기를 몰아 4월 비엔나에서 성공을 거두고 프라하, 바르샤바를 거쳐 다시 비엔나로 돌아와 10월에는 푸치니를 만나 그의 오페라 를 공연한다. 1921년 몬테카를로에서 를 공연하고 나폴리 로마에서 대성공을 거둔다. 베니스에선 와 으로 20분에 걸친 박수를 받고 16차례 커튼콜을 받았다.

1922년 그의 명성은 대단히 높아져 그라마폰에 초청되어 녹음했다. 이어 마드리드 레알 극장에 데뷔하고 스페인의 애국심을 자극하며 남미와 라틴 아메리카의 애국주의를 부추기기도 했다. 1923/24 시즌 라 스칼라로 돌아와 토스카니니와 함께 와 을 했다. 그러나 토스카니니는 그의 특이한 생활방식은 늘 못마땅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1926년 의 칼라프역 초연에 발탁된다. 그가 로 메트에 진출한 시기는 확실하지 않으나 이미 그곳에는 질리, 마르티넬리, 라우리―볼피 등 대가들이 포진하고 있던 때라 시즌 도중 탈락되고 말았다. 그는 비탄에 빠질 틈도 없이 몰래 메트를 떠났다.

그의 기이한 행동은 예측할 수 없었다. 가령 의 꽃노래를 공들여 부르고 난 뒤 피아노를 끌고 들어와 즉흥적으로 유행가를 부르는 식이었다. 라우리―볼피가 마지막 본 그의 공연은 40세 이전임에도 목소리는 쇠잔하고 무너져 넝마조각 같았다고 회상했다. 그의 일생은 그가 즐겨 부른 곡 'Ay, Ay, Ay' 가사처럼 허무했다.

윤 성 도(시인, 계명대 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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