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그렇지만 올해도 마지막 달이 되고 보니 다시 감회가 새롭다. 아쉬운 것도 많고 후회스런 일도 하나 둘이 아니다. 언제쯤이면 한 해의 막바지에서도 부끄러움이나 걱정거리 하나 없이 뿌듯하고 마냥 유쾌할 수 있을까? 생각이란 것은 하면 할수록 깊어진다. 그래서 내 인생의 막바지에서 돌아다보는 느낌도 이럴까 생각하면 매년 안타깝기만 하다.
내가 외래진료실에서 만나는 환자는 모두가 암환자이다 보니 나는 늘 인생의 가장 기로에 서 있는 분들과 마주하게 된다. 나는 절대 '암'이란 말을 먼저 꺼내지 않는다. 기분 좋은 단어도 물론 아니지만 환자들을 대하면서 저절로 굳어져 버린 나의 습성이다. 그러나 나와 만나게 되기까지는 대부분 스스로 자신의 병명을 알게 된다는 것을 나는 안다. 본인은 얼마나 놀라고 절망하였을까? 내 앞에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생각을 하였을까? 나는 첫인사를 종종 "많이 놀라셨지요?"라고 조용하고 담담하게 묻는다. 나야 항상 마주치는 일이니 담담하기도 하지만 당해 보지 못한 내가 그 심정을 모두 안다면 그건 당연히 거짓말이다.
대개의 경우 수술에 필요한 검사는 모두 외래에서 끝나고 입원은 수술 하루 전에 하게 된다. 그러니 오후 회진을 할 때면 다음날 수술받을 분들과의 재회가 드디어 병실에서 이루어진다. 많이 놀란 분들이라 얼굴에 수심이 가득할 것이라고 짐작한다면 그건 큰 오산이다. "일전에 외래에서 저와 만나셨지요?"라고 인사를 건네면 대부분 환하게 웃는다. 내일 수술할 의사를 오히려 안심시키려고 애써 웃는지는 알 도리가 없다. 감추는지는 몰라도 걱정하는 표정들도 아니다. 그래도 오지랖이 넓은 나는 구태여 "걱정 마시고 푹 주무세요. 내일은 저희만 애쓰면 됩니다."라고 가끔 쓸데없는 참견을 한다.
다음날 수술을 모두 마치고 다시 병실 회진을 한다. 오후에 수술한 환자는 아직 회복실에 있지만 오전의 환자는 이미 깨어나 병실에 있다. 진통제가 달려 있지만 아직은 많이 아프다. 통증 때문에 얼굴을 찡그린 환자가 내게 수고가 많았다며 가까스로 인사를 건넨다. 바로 이때가 내가 외과를 하기 참 잘했다고 느끼는 순간이다. 그리고 수술 다음날이 되면 빠른 회복을 위해 복도를 걸어다니는 운동을 한다.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다음날 수술을 받기 위해 입원하는 신참들에게 선배로서의 경험담을 늘어놓기도 한다. 그러다 나와 마주치면 반가워하면서 대부분은 "언제부터 먹나요?"라고 묻는다. 나는 "위를 잘라내고 새로 연결한 게 바로 어제인데 그게 벌써 그렇게 궁금합니까?"라고 웃으며 핀잔을 주지만 속으론 무척 고맙다. 잘 낫고 있지 않다면 그게 궁금할 수가 절대 없기 때문이다. 의사에게는 잘 나아 주는 환자만큼 고마운 분은 없다. 방송에 많이 등장하고 신문에 자주 난다고 명의는 아니다. 그저 유명한 의사일 뿐이다. 환자가 잘 나아야 그게 진정한 명의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했던가? 메스를 쥐던 외과의사가 무슨 배짱으로 펜을 잡았는지 나도 모를 일이다. 문학을 전공한 아내는 인공조미료가 들어가면 음식 맛을 해친다고 단 한 줄도 도와주지 않는다. 괘씸한 마음이 없지 않으나 나도 부엌살림을 안 도왔으니 할 말은 없다. 그런 나를 여기까지 끌고 온 힘은 다름 아닌 순전히 환자분들과의 경험이다. 반드시 이런 핑계가 아니더라도 이번 세모에는 내가 수술했던 환자분들과 따뜻한 차라도 한 잔 같이 하고 싶다. 반드시 내가 차 값을 내면서 그동안 너무 감사하다는 인사를 드리고 싶다.
정호영(경북대병원 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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