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목요 시조산책] 취운정 마담에게/김원일

굳이 어느 새벽 꿈속에서나마

나 만난 듯하다는

그대

내 열 번 전생의

어느 가을볕 잔잔한 한나절을

각간 유신의 집 마당귀에

엎드려 여물 씹는 소였을 적에

등허리에

살짝

앉았다 떠난

까치였기나 하오

그날

쪽같이 푸르던

하늘빛이라니.

'시조산책'에 웬 자유시냐고요? 그래, 이 작품이 자유시로 보입니까? 이 작품은 엄연한 시조, 그것도 사설(장형)시조죠. 물론 자유시를 쓰는 시인이 시조를 의식하고 썼을 리는 없고, 시상을 좇다 보니 저절로 그리 된 것일 터. 이런 예에서 우리는 우리말과 정서가 배태한 전통시가 형식이 우리 시의 근원적 속성에 얼마나 밀착해 있는가를 알아차리게 됩니다.

아직도 눈에 설다면 둘째, 셋째 연을 사설시조 중장의 앞·뒷구로 읽어 보세요. 금세 출렁거리는 너름새를 느끼실 겝니다. 초·중장의 무게를 온전히 받아내면서도 그 흐름을 되돌려 치는 종장은 더욱 기가 막힙니다. 마치 오랫동안 시조 형식을 부려온 솜씨로 착각할 지경이라니까요.

'翠雲'이면 어떻고, '醉雲'이면 어떻습니까. 열 번 전생과 현생을 오가는 사유의 활달함이 끝내 쪽같이 푸른 하늘빛에 닿는 걸요. 장욱진의 어떤 그림이 퍼뜩 떠오르는데요. 설사 그것이 귀밑머리를 푸는 연분까진 아니더라도, 사람과 사람의 만남에는 늘 '소'와 '까치' 정도의 인연은 녹아 있기 마련인가 봅니다.

박기섭(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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