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하늘을 본다. 나는 영화를 본다...' 나는 언제나 이처럼 '내가 본다'고 말한다. 그런데, 언젠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나는 항상 내가 본다고만 할까. 하늘이, 영화가 나를 본다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 '보는 나'가 없어도 볼 수 없지만, '보이는 대상'이 없어도 '본다'는 행위가 성립될 수 없다면 '내가 본다'는 말은 틀린 게 아닐까. 아마도 이것은 일방통행적이고 '나'중심적인 인식에 대한 최초의 의구심이었으리라.
이 책은 그 의구심을 단 몇 개의 문장만으로도 통쾌하게 부숴 버린다. "지각되는 것과 지각하는 것은 함께 오고 갑니다. 그 둘을 가능하게 하는 것, 그러면서도 그 어느 것도 아닌 것이 그대의 진정한 존재입니다." 라고. 즉 보는 나와 보이는 대상이 결국 하나이며 동시적 현상이라는 것이다. 더구나 우리는 자신이 자기라고 생각하는 '나'가 아니란다. 사람이란 기억과 습관의 덩어리일 뿐이며 세계는 마음이 창조한 형상일 따름이란다. 그래서 '모든 관념은 거짓이라는 것, 우리가 보는 이 세계는 마음의 투사물이며 본질적으로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명료하고 심오한 언어로 전해준다. 한마디로 '인간과 세계에 대한 고도의 통찰'이 담겨 있다.
인도의 성자 마하라지와의 문답으로 이루어져 있는 이 책은 읽을수록 놀랍다. 옮긴이의 말처럼 이 책은 "모든 철학을 넘어선 지고의 논변이며, 문학을 넘어선 가장 아름다운 서술이며, 언어를 초월하는 언어의 마지막 운동이며, 마음을 융해하는 마음 이전의 힘으로" 독자를 강력하게 끌어당긴다. 이것은 마치 콜럼부스가 발견한 신대륙 (그로부터 물질문명이 꽃피었지만), 그와 비견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신대륙을 예감케 한다. 외부가 아닌 마음의 대양 너머에서 발견할 수 있는 신대륙이다. 만약 그곳에 당도할 수만 있다면 과도한 물질문명에 대한 의존으로 피폐해진 영혼들이 어쩌면 평화와 안식을 찾을 수 있으리란 생각도 든다. 마음 너머에도 '생명의 대지'가 존재한다면, 생명의 깊은 곳과 우주의 깊은 곳이 서로 통한다면, 그 두 곳을 소통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 책은 말한다. 그것은 바로 마음에 '장애물 없음'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결국 또 '마음'이다. 하나의 사건이 누군가에겐 농담이 되고 누군가에겐 교훈이 되고 누군가에겐 분노의 계기가 되기도 하는 것처럼 마음에 따라 세상은 형상을 달리한다. 마음은 자신을 구속하는 사슬이 되기도 하고 자유에 이르게 하는 문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마음을 완전히 자각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실재의 '나'는 바로 이 '순수한 자각'이라 한다. 이 책은 시종일관 그것을 강조한다.
상황이나 환경은 바꿀 수 없어도 마음가짐은 바꿀 수 있다는 건 얼마나 다행한가. 마음이 나를 가진 게 아니라 내가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건 얼마나 큰 힘인가. 세계가 마음 안에 있다면, 마음을 가진 나는 세계를 가진 것이나 다름없으니, 나는 또 얼마나 큰가. 그래서 아무리 해도 모자라고 부족한 것이 '마음 공부'인가? 그런데, 이렇게 크고 중요한 '마음 사용법'이나 '나 자신을 아는 법'을 가르쳐 주는 학교가 세상에 하나도 없다는 건 어인 까닭인가?
bipasor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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