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강유정의 사랑한다면 이 영화를]싸움

한지승 감독은 영화 '싸움'에 대해서 "이것은 이혼 영화가 아니라 사랑 영화다."라고 말했다. 사랑하니까 싸운다고, 사랑이 끝나면 싸울만한 열정도 에너지도 사라지고 만다고 말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사랑이란 감정은 오묘한데가 있어 그것에 빠지는 심리도 설명하기 힘들지만 그것으로부터 헤어나오는 이유 역시 찾기 힘들다.

영화 속에서 여자 진아(김태희)는 상민(설경구)에게 바짝 다가가 다그친다. '사과해'라고. 실상 진아의 요구는 남자가 끝내 그 말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시작된다. "사과해, 한 번 만이라도 아니 이번이 마지막이야."라고 제법 눈물까지 글썽인다. 하지만 이런 엄포에 쉽게 자존심을 버릴 사람은 드물다. 상민은 대답한다. "유감이다."

진아의 질문은 애초부터 예상답을 가지고 있다. '저 남자는 결코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추측말이다. 그러니까 진아의 요구는 오히려 이별의 분기점을 확실히 만들고자 하는 심리라고 할 수 있다. '그래, 난 당신이 사과만 했더라도 헤어지지는 않았을 꺼야.'라는 알리바이와 면죄부를 스스로에게 주는 것이다. '이 이별에는 당신의 책임이 커.' 그렇게 영악하게 이별하는 사람들은 자신을 보호한다.

대니 드 비토 감독의 '장미의 전쟁'은 그런 점에서 훨씬 싸늘한 작품이다. 열열히 사랑했던 두 남녀는 이혼 시기가 다가오자 세상에 없는 원수로 돌변한다. 상대방이 하나씩 방법을 강구할 때마다 적수의 저항은 악랄해져간다. 이미 둘은 서로에게 적이다. '싸움' 역시 유사한 선상 위에 놓여 있다. 헤어지고 난 후 '시계추'에 집착한 상민이 싸움을 건다. 상민은 집에 가만히 누워 있다가 자신에게 읊조린다. "뭔가 없어졌는데, 뭐지, 뭐지." 그러다가 그는 '시계추'를 외치며 일어선다.

시계추는 그들의 남은 감정이 응결된 욕망의 덩어리이다. 중요한 것은 시계추가 아니라 시계추로 상징되는 '사라진 것'이다. 두 사람은 격렬하게 서로와 충돌한다. 여전히 서로의 삶에 개입하지 못해 안달을 한다. 겉으로는 피하고 싶어 하지만 그럴수록 더 깊이 상대방을 끌어들인다. 그런 점에서 '싸움'은 이혼한 부부의 이야기라기 보다는 동거하다가 헤어진 연인들의 이야기처럼 여겨진다. 결혼은 생각보다 그리고 기대보다 훨씬 더 현실적이다. 한지승 감독의 '싸움'에는 이혼 당사자와 친구 이외는 그 누구도 등장하지 않는다. 아이나 시부모와 같은 귀찮은 소품들은 모두 제거해버린 상태이다.

하지만 이별보다 이혼이 어려운 까닭은 그것이 곧 생활의 분리이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것을 반으로 나누자는 상민은 함께 찍은 사진조차 오려서 나누지만 생활은 그렇게 보이는 것으로만 이루어져 있지는 않다.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겪어야 했던 분리장애의 고통, 이혼에는 또 다른 분리장애의 고통이 있지 않을까? 내 손으로 만들었던 한 세계를 무너뜨려야 하는 고통, 손을 빼자 마자 무너지는 모래로 만든 두꺼비집같은 허무함, 그런 것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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