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주말에세이] 텔미댄스와 엉거주춤

"니가 날 좋아할 줄은 몰랐어, 어쩌면 좋아, 너무나 좋아."로 시작되는 원더걸스의 노래 '텔미'가 2007년 하반기 가요계를 흔들었다. 이 '놀라운 소녀'들이 '텔미'를 부르며 추는 '텔미 댄스'는 댄스의 새로운 유행을 만들기도 했다. 좋아서, 너무나 좋아서 현실이 아닐까봐 자꾸 꼬집어 볼 정도로 좋아서 부른 노래와 신명나게 춘 춤은, 세대 차이를 뛰어넘어 듣고 보는 이에게 그야말로 '좋음'을 한껏 전염시켰다.

그런데 2007년 나는 무슨 춤을 추고 살았나 돌아본다. 참 묘하게도 내가 부르고 춘 춤은 "니가 날 싫어할 줄은 몰랐어"란 가사에 '엉거주춤'이 아니었나 싶다. '엉거주춤'이란 낱말의 끝에 '춤'자가 들어간다고 해서 그걸 '춤'으로 말하는 것이 논리에 맞을 리 없지만, 한때 우리의 심금을 울렸던 공옥진의 춤을 생각하면 '엉거주춤'이 춤일 수 없다고 우기기도 멋쩍지 않을까.

그래서 '엉거주춤'이란 낱말을 소재로 "'엉거주춤'은 신명나는 그런 춤이 아니지/ 앉지도 서지도 자빠지지도 못하여/ 간신히 세상 붙들고 내가 춰온 그 춤이지."라는 작품을 쓰기도 했다. 어찌 이런 일이 올 한 해뿐이었으랴만, 나의 2007년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서 엉거주춤할 수밖에 없었던 경우가 그 어느 해보다 많았다. 따라서 2007년에 내가 춘 춤은 '엉거주춤'이 틀림없다.

그런 사실들이 하도 짜증이 나서 '젠장'이란 낱말을 들고 "'젠장'은 간장 된장 같은 양념장이 아니지만/ 놀라울 정도의 맛이 배어있다/ 지독한 냄새가 나서 침을 탁 뱉고 싶은…."으로 읽기도 했다. 참으로 '젠장'엔 엄청난 독소가 들어있다. 그대로 삼키면 심각한 지경에 이를 수 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젠장'을 연발하며 '엉거주춤' 살아왔으니 참으로 기막힌 일 아닌가.

왜, 그럴 수밖에 없었던가. 그 이유야 나의 무능이라는 말 외에는 더 할말이 없지만, '삶'이란 낱말로 "'삶'이란 글자는 사는 일처럼 복잡하다/ '살아감'이나 '사람'을 줄여 쓴 것 같기도 한데/ 아무리 글자를 줄여도 간단해지지 않는다."란 시를 썼다.

그러면서 자위하려 했다. 삶은 왜 그렇게 복잡한가, 이 글자 하나가 안고 있는 콘텐츠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하지 않은가. 그래서 '젠장'을 연발하고 '엉거주춤'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또 하나의 까닭은 '외로움'과 손잡는다. 낱말 '섬'을 소재로 "'서다'라는 동사를 명사화하면 섬이 된다./ 뭍에서 멀리 떨어져 마냥 뭍을 그리는 섬/ 사람은 혼자서는 그 때부터 섬이 되는 것이다."라고 썼다. 누가 대신 살아주는 것도 아니고 자기 삶은 자기가 살아야 한다는 이 거부할 수 없는 사실 앞에서 외롭지 않은 사람 어디 있으랴 하며 위로해 온 것이다.

복잡하고 짜증나고 외로운 삶,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이렇게 살 수만은 없지 않은가. 이제 제대로 된 노래도 부르고 신명나는 춤도 한판 춰보고 싶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내가 찾은 답은 '그냥'이다. 나는 "'그냥'이란 말과 마냥 친해지고 싶다 나는/ 그냥 그냥 읊조리면 속된 것 다 빠져나가/ 얼마나 가벼워지느냐/ 그냥 그냥/ 또 그냥."이라고 읊었다.

이 작품을 두고 문학평론가 김석준은 조주의 '무자화'이고 오쇼 라즈니시의 '무심'이며 임제의 '할'이라고 평한 바 있지만 그건 아무래도 좀 지나친 것 같고, '그냥'의 담백함을 가슴에 가두어야 제대로 된 춤 한판 출 수 있지 않을까 싶다.

2007년 내 삶과 시의 중심은 '낱말 새로 읽기'에 집중되었다. '엉거주춤', '젠장', '삶' 그리고 '그냥' 같은 낱말들을 서른 개 정도 새로 읽었다. 이 작업을 하면서 참 가당찮게도 많이 희희덕거렸다. 그 희희덕거림이 나를 가눌 수 있게 하는 유일한 길이 되어 주었다.

해가 바뀌어도 나는 '그냥'을 읊조리며 이 작업을 계속할 것이다. '엉거주춤'이 아닌 제대로 된 '글 춤' 한판 춰보고 싶기 때문이다. 설사 이 춤이 나 아닌 사람들에겐 '깨춤'으로 보일지라도….

문무학 시조시인·대구문인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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