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지난 100년간 쥐띠 해 생긴일은?

정부 수립→4·19 혁명→7·4 남북성명→아웅산 사건

무자년 쥐띠 해가 밝았다. 지난 100년간 쥐띠 해에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그리고 새해는 어떤 일들을 준비하고 있을까. 그동안 쥐띠 해가 남긴 발자취를 살짝 들여다보자.

지난 100년의 쥐띠 해 중 가장 의미있는 때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1948년일 듯하다. 현대 한국사의 기본 지형은 이 해에 형성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월 5일 남조선과도정부가 수립된 가운데 반대 움직임도 거세게 일었다. 김구가 '삼천만 동포에게 읍소함'을 발표해 단독정부 반대입장을 분명히 했다.

하지만 제주 4·3항쟁의 비극이 계속되는 가운데 남한만의 단독 총선거가 5월 10일 실시됐고, 제헌의회 개원(5월 31일), 헌법공포(7월 17일), 대통령선거(7월 20일), 정부수립 공포(8월 15일) 등의 정치일정이 숨가쁘게 이어졌다.

북한 역시 단독정부 수립 쪽으로 움직였다. 속도는 남한보다 한 박자 정도 느렸다. 2월 8일 조선인민군 창설이 발표됐고, 4월 27일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 초안이 승인됐다. 그리고 8월 25일 최고인민회의 선거에 이어 9월 3일 헌법이 채택됐고 9월 9일 북한 정부 수립이 선포됐다. 10월 20일 남한에서는 여순반란사건이 일어나 시국이 혼미를 거듭했다. 이에 영향을 받아 11월 20일 국가보안법이 제정되기에 이른다.

이승만 정권이 막을 내린 1960년도 한국 현대사에서 중요한 분기점이었다. 3·15 부정선거에 이은 4·19혁명은 결국 이승만 하야(5월 29일)를 이끌어내며 민주화 진전에 큰 획을 그었다. 이어 6월 15일에는 내각책임제 개헌안이 국회를 통과했고, 이에 힘입어 윤보선 대통령이 8월 13일 취임했으며 8월 19일엔 장면 정권이 탄생했다.

1972년은 남북분단 역사에서 획기적인 해로 기록됐다. 꽁꽁 얼어붙었던 남북관계에 갑작스런 해빙바람이 분 것이다. 5월 2일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의 극비 방북은 7·4 남북공동성명 발표로 이어졌다. 하지만 10월 17일 10월 유신이 단행되면서 역사는 뒷걸음질치며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렸다.

1984년에도 남북관계는 경색을 벗어나지 못했다. 한 해 전에 터진 KAL기 격추사건과 아웅산사건 등의 여파가 강하게 상반기 정국을 지배했다. 그러나 남한 수재를 돕기 위한 북한 쌀이 9월 29일 휴전선을 넘고 남북적십자회담이 11월 20일 7년 만에 다시 열림으로써 변화의 조짐을 보였다. 정치활동 규제자들에 대한 해제도 계속돼 정치적 분위기는 상당히 누그러졌다.

김영삼 정권 후반기인 1996년은 역사 바로세우기가 활발하게 진행됐다. 일제강점기시대의 명칭인 국민학교가 1월 1일 초등학교로 변경된 데 이어 11월 13일에는 옛 조선총독부 건물이 철거됐다. 북한공군 대위가 미그 19기를 몰고 귀순한 것은 5월 23일의 일이며 9월 18일에는 강릉 앞바다에 침투한 북한 잠수정이 발견됐다.

일제강점기로 거슬러올라가면, 1912년 토지조사령이 공포돼 토지조사사업이 본격화했고, 대한제국의 봉건지배질서의 회복을 목적으로 한 척사유림계열의 독립운동단체인 독립의군부가 임병찬에 의해 조직됐다. 1924년에는 독립운동단체인 신민부가 탄생했고, 무산계급 해방을 목적으로 하는 조선노농총동맹도 창립됐다.

1936년 6월에는 안익태가 작곡한 애국가가 등장했고, 8월 10일에는 손기정 선수가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해 망국의 한민족에게 위안을 주었다. 하지만 일본은 조선사상범보호관찰령 등을 공포하며 조선인에 대한 탄압을 더욱 가속화했다.

이경달기자 sara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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