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4월 11일, 중환자실에 있던 아내는 그날따라 편안해 보였다. "난 다시 태어나도 당신하고 결혼할 낍니더. 이번 생에 잘 못해준 거 다음 생에는 꼭 다 갚으께예. 내 없더라도 가족들하고 잘 사이소."
남편은 손사래를 쳤다. "그런 소리하지 마라. 이제까지 잘 버텨놓고 무슨 소리하노. 다음 생에는 난 니캉 결혼 안할끼다. 그러니 힘내라. 빨리 일어나서 이생에서 함께 잘 살아보자."
그게 마지막이었다. 자정 무렵, 아내는 그를 떠났다.
대구 남구청 새내기 환경미화원 손경철(45) 씨. 2007년 손 씨는 아내의 죽음으로 넋을 놓았다. 아내가 병원 신세를 지기 시작한 건 14년 전인 1993년. 지병인 천식이 급격히 악화되면서 아내에겐 병원이 집이나 다름없었다. 새벽녘 아내의 숨소리가 거칠어질 때마다 그는 아내를 업고 병원으로 뛰었다. 아내는 1년에 8개월을 병원에서 보냈다. 화장품 도매상을 하며 돈도 꽤 모았지만 불어나는 치료비를 감당할 길이 없었다.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며 돈을 벌고, 돈이 떨어질 때까지 아내 곁에 머물다가 다시 일자리를 구하는 일이 반복됐다.
"죽을 고비도 10여 차례나 넘겼어요. 그런데도 상태가 나아지지 않더군요. 합병증이 여기저기서 나타났지만 수술 위험 때문에 제대로 치료도 받지 못했죠." 병원 생활이 길어지고 생활고가 계속되면서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다. 큰 아이는 아동복지시설로, 딸과 아내는 병원으로, 그는 일자리를 위해 떠돌았다. 그렇게 14년이 흘렀다. "부모 노릇을 제대로 못했는데 기특하게도 아이들은 잘 자라줬어요. 큰 아이는 지난해 대학의 사회복지학과에 합격했고, 딸아이는 늘 아내 곁을 지켰죠."
아내가 떠난 후유증은 너무나 컸다. 그는 3개월 동안 거의 잠을 들지 못했다. 15분 정도만 잠들었다가 깨고는 밤을 지새는 일이 잦았다. 게다가 잘 먹지도 못해 몸무게가 14kg이나 빠졌다.
"꿈에서 늘 병원을 헤맸어요. 10년이 넘게 병원을 들락거렸으니 그럴 만하죠. 문득 놀라 깨 한참 동안 멍하게 앉아있다 다시 눕는 일이 반복됐습니다."
그러나 언제까지 그렇게 살 수는 없었다. 절망과 슬픔 속에서 빠져나와야 하는 것은 물론 먹고 살 일도 걱정해야 했던 것. 이런 그가 희망을 찾은 건 지난해 11월이었다. 지인으로부터 남구청 환경미화원 공채에 응모해보라는 권유를 받았던 것. 월 160만 원의 수입과 59세 정년 보장. 생계가 절박했던 그에게는 기적이나 다름없는 기회였다. "순간 앞이 환해졌어요. 아내를 데려간 신이 내려준 마지막 기회다 싶었죠." 선발 시험 5일을 앞두고 손 씨는 매일 2시간씩 신천변으로 나가 달리기를 했다. 30kg 무게의 모래주머니를 들고 뛰는 종목에 대비하기 위해 볼링공 2개가 든 가방을 메고 도로가를 뛰었다. "사람들의 조롱 섞인 손가락질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았어요. 인생이 달린 문제였으니까요. "
11월 27일, 25명을 모집하는 시험장에 129명이 몰려들었다. 20, 30대 젊은이들 틈에서 손 씨는 손수레를 끌고 모래주머니를 맨 채 죽기살기로 달렸고, 끝내 합격통지서를 손에 쥐었다.
마음의 여유가 생기면서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도 늘어났다. 지난해 12월 23일에는 처음으로 아이들과 놀이공원에 소풍도 갔다. 아내의 빈자리가 여전히 크지만 가족들의 얼굴에는 조금씩 미소가 살아나기 시작했다. 그날 그는 두 아이에게 동전이 가득 찬 저금통을 크리스마스선물로 건넸다. 6개월 동안 커피값을 아껴가며 한 푼 두 푼 모은 25만 원이었다.
2008년, 그는 또 다른 꿈을 꾼다. "이제 흩어져 사는 우리 가족을 다시 모이도록 해야죠. 아내의 오랜 투병 생활로 쌓였던 빚도 조금씩 갚아 나갈 거고요. 그동안 챙겨주지 못했던 아이들을 위해 살려는 제 꿈, 올해는 꼭 이뤄지겠죠?"
장성현기자 jackso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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