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전경옥 본사 논설위원 '개성 관광기'

비록 주변엔 민둥산이지만 500년 도읍지 숨결 그대로

북으로의 땅길이 열렸다. 한국전쟁으로 서울-개성간 열차 운행이 중단된 이후 56년 만에 경의선 열차가 다시 이어진 것이다. 또한 지난 12월 5일 일반인의 첫 개성 육로 여행이 시작된 지 24일만인 29일, 대구·부산지역 첫 개성 관광객 340여 명이 고려 500년 도읍지 개성에 발을 들여 놓을 수 있었다.

오전 5시 30분경, 동대구역을 출발한 지 5시간여 만에 철마는 마침내 임진강역에 도착했다. 바깥은 칠흑처럼 어둡다. 임진강…. 책에서만 보던 그 이름을 현실로 느끼는 순간 가슴 한귀퉁이가 싸아해져왔다.

우리를 태운 버스는 10여분 만에 경의선 도로 남북출입사무소에 도착했다. 출경(出境) 수속 준비가 시작됐다. 여행사 관계자가 주의사항을 강조했다. 반드시 남측·북측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것, 차량 이동 중에 바깥 풍경이나 북한 주민 촬영을 하지 말 것 등등. 사람들의 얼굴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우리는 반입 금지품목인 휴대폰과 휴대폰 배터리·충전기·필름 카메라·녹음기·라디오·MP3 등을 맡겼다. 남북의 길은 조금씩 열리고 있지만 소통의 길은 여전히 막혀있음을 실감하게 했다.

북한방문증을 받아 목에 건뒤 구내 식당에서 설렁탕으로 아침 식사를 했다. 출경 수속을 마친후 다시 버스를 타고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측 출입사무소로 향했다. 길 양쪽엔 철조망이 높게 쳐져 있었다. 10여분 뒤 도착한 북측 출입사무소. 북한군인들이 곳곳에 보였다.

오전 8시 30분경, 개성을 향한 버스마다 2명의 북한 남자 안내원들이 올라탔다. 버스는 개성-평양간 고속도로를 시속 40km쯤의 속도로 달렸다. 나중에 알았지만 맨 앞의 안내 버스가 속도를 그렇게 조절하고 있어 다른 차들도 느리게 갈 수밖에 없었다 한다. 한국 버스 기사들은 "속이 터질 지경"이라고 했다. .

■박연폭포

북측 출입사무소를 출발한지 1시간쯤 됐을까, '박연폭포'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려 5분 정도 걸리는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황진이·서화담과 더불어 송도삼절(松都三絶)로 불렸던 박연폭포는 당당한 기운이 넘쳐보였다.

너부데데한 바위 하나가 물 위로 솟아 있었다. 바위 위엔 황진이가 긴 머리채를 먹물에 적셔 썼다는 한시가 새겨져 있었다. 북한 안내원이 "아무도 그 시를 풀어내지 못했는데 오직 한 분(김일성 주석)만이 알아보셨다."고 했다. 사람들이 오른쪽 정자 위쪽 '관음사' 가는 길로 줄지어 가고 있었다. 고려때 성문인 대흥산성 북문을 지난 평평한 곳에 매점이 있었다. 산타클로스처럼 빨간 옷차림을 한 젊은 여성들이 "따끈한 인삼차가 1달러"라며 손님을 불렀다. 주변 바위엔 김일성 주석의 이름뿐 아니라 이름모를 사람들의 이름도 허다히 새겨져 있었다.

■13첩 반상과 통일거리

고려 970년에 창건된 고찰 관음사를 둘러본 후 개성시내 남대문 근처의 통일관에서 점심 식사를 했다. 메뉴는 그 유명한 '개성 13첩 반상. 밥과 국, 11가지 반찬이 앙증맞은 놋그릇에 담겨 뚜껑까지 덮여 있었다. 닭고기국, 도라지무침, 오이볶음, 생선튀김, 계란 장조림, 김치,약 밥…. 하지만 기대감은 이내 실망으로 바뀌었다. 밥은 해묵은 쌀인듯 누렇고 푸슬거렸다. 모두들 "밥이 와 이렇노?"하며 의아해 했다. 반찬들은 맛이 없었고, 개성 약밥은 너무 달았다.

식당 주변의 큰 네거리는 휑했다. 개성의 중심가격인데 이리도 적막강산이라니…. 한쪽에 있는 남대문 쪽으로 발걸음을 떼자 안내원들이 앞을 가로막았다.

뒤쪽 높은 고지대에 김일성 동상이 높이 서있었다. 스물 한두살 때 남녘으로 피란온뒤 반세기 만에 고향에 왔다는 경산의 우금점 할머니(78). 개성 호수돈 고녀 졸업생인 할머니는 같은 관광단에서 여고 동기생과 후배를 50여년 만에 만나게됐다며 감격해 했다. 할머니는 변해버린 고향의 모습에 마음 아파했다. "그땐 이 네거리 사방이 전부 상점들이었어. 옛모습이 남아있는건 남대문밖에 없어."

한 안내원에게 손으로 김일성 동상쪽을 가리키며 어디까지 갈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안내원은 '손가락질하면 안됩니다.'라고 주의를 주었다. 네거리 한쪽의 남대문에도 가지 못하게 했다. 동상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을 수는 있었지만 동상 부분이 잘려서는 안되며, 시내를 배경으로한 촬영도 금지당했다.

■숭양서원과 선죽교, 성균관

고려말 충신 포은 정몽주가 살던 집터에 세워졌다는 숭양(崇陽)서원은 1573년 지어져 1575년 사액서원이 됐다. 한국전쟁때 폭격을 당하지 않아 옛모습이 잘 보존되고 있다고 했다. 처마가 사찰처럼 단청으로 돼있어 이색적이었다. 그런데 현판이 보이지 않았다. 해설원이 1906년에 일본인들이 떼갔다고 답했다. 하지만 우리끼리는 "유교 교육기관이 공산정권의 입맛에 안 맞아서 뗀걸거야"라고 속삭였다.

선죽교는 길이 8m 남짓에 너비 3m 남짓한 작은 다리였다. 1216년 세워졌고 원래 이름이 선지교였으나 포은선생이 1392년 4월 이방원에 의해 피살된 후 참대가 돋아나왔다하여 선죽교라 불린다 했다. 다리에는 불그레한 흔적이 남아있었다. 감격해 하는 사람들에게 해설원이 "분위기를 돋우기 위해 비슷한 돌을 갖다놓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충신의 피가 적신 곳을 밟을 수 없다하여 원래 다리는 돌난간으로 가로막혀져 있었고, 대신 그 옆에 통행을 위한 또다른 돌다리가 놓여져 있었다.

개성 성균관 문에 들어서자 10여 그루의 아름드리 고목들이 반겨주었다. 성균관이 고려 992년에 창설됐으니 1천여 년이 넘는 나이다. 전체적인 건물 모습은 서울의 성균관과 비슷하다 한다. 현재는 고려박물관으로서 1천여 점의 유물이 전시돼 있다. 특히 청자가 눈길을 끈다. 우금점 할머니는 "예전 개성박물관의 청자들은 정말 대단했지. 지금 것은 양으로나 질적으로는 비교도 못할 정도야"라고 씁쓸해 했다.

■돌아오는 길

오후 4시 남짓해 버스는 남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퇴근 무렵이라 자전거 타고 가는 사람 등 행인들이 더러 보였지만 적막하긴 마찬가지였다. 누군가가 "여긴 꼭 세트장 같아"라고 말했다.

시내에는 소규모의 아파트들이 많았으나 조금만 벗어나면 허름한 단층집 일색이다. 낡은 기와, 회벽에 파란색 페인트칠을 한 창문 등 중국 시골집 비슷했지만 훨씬 더 초라해 보였다. 나지막한 등성이의 마을들은 고요해 보였다. 가끔 창문 안쪽에서 밖을 내다보는 주민들의 모습이 비쳤다. 골목 입구엔 군인들이 서있었다. 마을마다 나무가 한그루도 없는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불쏘시개로 때버린걸까, 무슨 다른 이유라도 있는걸까.

개성공단을 돌아 갈때와 똑같은 수순으로 다시 남으로 돌아왔다. 마치 혈육을 내버려두고 온 듯 짠한 느낌이 내내 가시지 않았다. 첫 개성 여행에 대해 "볼 것도 없고 먹을 것도 없고…"라며 시니컬한 반응을 보이는 사람도 있고, "인상적인 여행"으로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시인이기도 한 박재열 경북대 교수는 "가난하다는 점을 빼고 본다면 아름다운 부분들이 많았다."고 말했다. "비록 민둥산이지만 부드러운 능선과 하얀 길들, 골짜기를 채운 개울물들이 향수를 불러일으켰다."면서 개발논리에 매몰되는 일이 없기를 바랐다. 짧지만 긴 여운을 안겨준 개성 여행! 왕건왕릉과 공민왕릉, 황진이와 서화담의 무덤이 있다는 영통사 가는 길을 보기 위해서라도 다시 한 번 찾으리라, 그렇게 혼자 작별인사를 했다.

전경옥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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