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의 여명을 깨우는 첫차에는 서민들의 고단하지만 소박한 꿈과 애환이 짙게 배어 있다.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새해 첫날 이른 새벽, 첫차를 타는 시민들의 표정은 벌써 분주하다. 누구보다 일찍 고단한 하루를 시작하지만 오히려 여유롭다. 새벽의 첫 시내버스에는 하루에도 수십 명의 사람들이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간다. 세상이 아직 깨어나지 않은 시각, 새해 희망을 안고 달리는 첫차에 올랐다.
♠ 지하철
▶ 생애 첫 차 구입 야심찬 목표.
새해 첫날 새벽, 대구지하철 반월당 역. 역무원 최동영(34) 씨는 대뜸 "결혼하고 싶다."고 말했다. 노총각 축에 도 끼지 못하지만 집에 있는 가족들 생각을 해서라도 빨리 결혼하겠다는 생각이 굴뚝같다. 1년된 여자친구에게 프러포즈할 일만 남았다. 또 하나 환승역이라 길을 못 찾는 승객들과 취객들에게 더 친절한 서비스로 대해주겠다는 각오도 해봤다.
올해로 스물아홉이 된 김수진(여) 씨도 결혼하는 것이 올해 최대 목표다. 올 가을에는 웨딩마치를 울리고 싶다. 그것 외에는 특별한 소망이 없다. 하긴 결혼보다 더 큰 꿈이 있을 리 없다.
눈을 감고 2호선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는 박유정(23·여) 씨는 밤새 고시원에서 공부를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새해가 바뀌었다는 걸 실감하지 못해요. 그러나 새해에는 꼭 국가고시에 합격하고 싶어요." 공무원이 되겠다는 야무진 꿈이다. 그녀에게 새해 첫 새벽은 항상 희망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새내기 직장인 김성은(24·여) 씨는 차를 사고 싶다. 그녀는 대구 달서구에서 수성구에 있는 회사까지 1시간 이상이 걸린다. 이제 3개월째로 접어든 회사생활이지만 월급을 차곡차곡 모아 내 생애 '첫 차'를 사야겠다는 야심찬 목표를 세웠다. 남자친구는 언제든지 구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녀에게 새해는 장밋빛 가득한 세상이다.
▶ 경제 회복 최우선
남편 출근시키고 두 아이들 아침밥을 지어놓고 출근길에 나선 이혜정(37)씨는 대뜸 "집값이 빨리 올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분양받은 시지의 아파트에 입주해야 하는데 지금 살고있는 칠곡아파트가 팔리지 않는다. 경기탓이다. 집값이 떨어진데다 사겠다는 사람도 없다. 지난해 승진한 남편이야 걱정 없다지만 그렇다고 내가 잘릴 걱정도 해본다.
"서민들 살기가 힘들어요." 정영식(51·여) 씨는 개인택시하는 남편 때문에 경제회복을 최우선 희망사항으로 꼽았다. "개인택시하는 남편이 벌어오는 게 없다."며 "이러다가는 길에 나앉게 생겼다."며 푸념을 늘어놓는다. 기름값은 오르고 경기탓에 손님도 줄어들었다. "나라도 벌어야겠다 싶어서 직장을 구해서 다닐 수 밖에 없다." 그녀 얼굴 가득 경기 걱정이 가득 묻어났다.
그러나 특별한 것은 없다. 건강이 제일이다. 내 몸도 소중하지만 가족과 다른 사람의 행복까지도 기대해본다. 새해이기 때문이다. 서상호(77) 씨나 김재근(73) 씨는 "이 나이에 별난 소망이 있을리 없다."면서도 "건강하게 살 수 있는 게 행복이고 가족화목이 우선"이라고 말했다. 해인사로 여행을 떠나는 남중란(64) 씨는 "다같이 잘사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착한 마음씨를 내보였다.
글·서명수기자 diderot@msnet.co.kr
♠ 시내버스
▶ 서툰 한국말로 소망 털어놔
지난 1일 오전 5시 30분 지하철 2호선 사월역 정류장. 909번 시내버스가 어둠을 뚫고 도착한다. 버스에 오르자 운전기사 박재섭(39) 씨가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10여 분 뒤 대구자연과학고 맞은편 정류소에서 한 아주머니가 버스에 오른다. 추운 날씨 속에 목도리를 친친 감았다. 진순옥(54·여·대구시 수성구 시지동) 씨는 23년째 새벽 첫차를 타고 있다. 버스는 진 씨의 자가용인 셈이다. 진 씨는 대구 동구시장 부근에 있는 한 택시회사에서 청소일을 하고 있다. "새해 첫날에도 일하느냐?"는 질문에 "새해 첫날뿐만 아니라 명절에도 첫차를 타고 일하러 다닌다."고 말했다. 진 씨는 "일하는 회사가 요즘 경기침체로 어렵다."면서 "새해에는 가족들이 건강하고 나라 살림이 잘 됐으면 더 바랄 것이 없다."고 했다.
어둠을 뚫고 버스는 다시 달렸다. 새해 첫날 연휴라서 손님은 그리 많지 않다. 지나가는 버스들도 대부분 텅텅 비어있었다.
동대구고속버스터미널 정류소에서 경산에 있는 장갑공장에 일하러 간다는 양메일라(46·대구시 동구 신천동) 씨가 탔다. 양 씨는 3년 전 필리핀에서 대구 남자와 결혼해서 대구에 정착했다. 양 씨는 "새해에도 남편이 건강했으면 한다."고 서툰 한국말로 소망을 이야기했다.
곧이어 첫차에 올라탄 최종악(64·대구시 동구 신천동) 씨는 새해 첫 출근의 발걸음이 가볍지 않다. 최 씨는 수성구 지역의 한 아파트에서 경비를 하고 있다. 하지만 최근 아파트에서 무인경비시스템을 도입하는 바람에 경비원들이 대폭 줄었다. 연말까지 매일 첫차를 타고 일터로 출근했지만 이날은 조금 늦어졌다. 근무시간이 변경됐기 때문이다. "새해 첫 출근이지만 마음이 무겁습니다. 세 사람의 몫을 이제 한 사람이 맡게 되면서 업무 부담이 늘었지만 임금은 도리어 깎였습니다. 임금이 적어진 것은 서운하지만 올해에도 계속 일하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 새해엔 카페 같은 버스 만들고 싶어
이날 909번 첫차를 운전한 한일운수 박재섭 씨는 9년째 시내버스를 몰고 있다. 새벽 첫차를 몰기 위해서는 오전 4시에 일어나야 한다. 그는 오전 4시 30분에 회사로 출근해 차량을 점검하고 손님 맞을 채비를 한다.
그는 "새벽 첫차를 타는 사람들의 발이 되어서 일터까지 무사히 데려가 주는 것에 사명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새벽 첫차를 타면 자주 만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반갑게 인사해주는 시민을 만나면 그도 즐겁다.
박 씨는 새해엔 편안한 카페 분위기가 나는 시내버스를 만들고 싶다. 출퇴근 시간이 불규칙하기 때문에 아직 노총각이라는 그는 "새해에는 좋은 사람을 만나서 반드시 결혼하고 싶다."고 말했다.
"저희 버스 기사들도 새해에는 친절하고 안전하게 손님들을 맞이하겠습니다. 버스기사들이 신명나게 일할 수 있도록 시민들이 많이 이용해 주십시오."
모현철기자 momo@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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