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름/박범신 지음/랜덤하우스 코리아 펴냄
사랑은 믿지 않지만, 사랑에 대한 열망만큼은 믿는 이들을 위하여
바람이 신산한 새해 첫날, 자신의 스승이었던 슈만의 아내 클라라만을 오로지 사랑하며 평생을 독신으로 보냈던 브람스의'독일 레퀴엠'을 듣고 또 듣는다.
죽은 자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작곡되었던 레퀴엠이 이토록 가슴 저린 연가로 들리는 까닭은 무엇일까? 사랑하는 연인 클라라를 위로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일까? 죽음에 의해 남겨진 사람의 통곡과 슬픔을 위로하는 사랑이란 과연 어떤 것일까? 그에게 사랑의 부재(不在)는 어떤 의미였을까?
문득 박범신의 소설 '주름'을 떠올린다."내 생의 마지막에 찾아와서 뒷덜미를 사정없이 후려친 여인, 그녀와의 광포한 사랑에 나는 매일 죽었고, 매일 다시 살아났다."
'주름'은 평범한 일상, 그 시간의 상실(주름)을 살던 중년의 남자, 김진영에게 불현듯 찾아온 치명적인 사랑과 반역적 도덕성을 담은 소설이다. 일상의 삶을 살던 중년의 남자에게 어느 비 오는 날, 번개의 날선 섬광처럼 찾아든 한 여인, 천예린의 사랑과 배신을 쫓아 나선 유랑의 길은 인도와 스코틀랜드의 북해도, 카프카즈 산맥에 이르러 마침내 바이칼 호수에 이르러 죽음을 요구하는 사랑으로 끝을 맺는다.
브람스와 김진영은 클라라와 천예린은 아니 '주름'은 '독일 레퀴엠'과 닮아 있다. 일상은 현실이라는 가면을 쓰고 시간의 주름을 만들어 가지만 사랑에 대한 열망은 그것에 속절없이 훼손당하면서도 좌절하지 않고 반역을 꿈꾼다.
"나이는 생물학적 숫자에 불과합니다. 지금도 사랑 때문에 고통 받습니다. 나이가 들어도 사랑에 대한 열망만큼은 늙지가 않아요. 나는 그 힘으로 소설을 씁니다."
1996년 절필의 어둡고 깊은 낭하에서 빠져나와 '침묵의 집'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중편을 2006년 개작한 '주름'은 그의 말처럼 사랑은 믿지 않지만, 사랑에 대한 열망만큼은 믿는 이들을 위한 소설이다.
세상은 인스턴트로 넘쳐나고 일회용 유희가 판을 친다. 또한 오로지 디지털만이 유일한 화두인양 아날로그를 밀어내고 사랑의 열망은 집착이라는 어리석음으로 치부된 지 이미 오래다.
아! 하지만 사랑의 힘 없이 세상이 존재한 적이 어디 단 한번이라도 있었던가? 엘피(LP)판의 잡음이 오랜 여운으로 남는다. 478쪽. 1만 3천 원.
전태흥(여행작가·(주)미래데이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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