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수암칼럼]590년 전의 '운하' 논쟁

大運河(대운하) 논쟁이 새 정부 출범도 되기 전에 시끄럽다. 운하, 뚫는 게 좋은가 안 뚫는 게 옳은가. 뚫는다면 먼저 무엇부터 해야 할 것인가. 그 해답을 얻기 위해 590여 년 전 왕조시대로 되돌아가 보자.

1411년 태종실록은 운하를 놓고 갈라진 조정의 찬반논쟁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태종 : "운하 파는 일을 각 道(도)에 알렸는가?"

좌정승(성석린) : "이미 충청도, 강원도에 알렸습니다."

태종 : "올해는 윤 12월 15일이 입춘이라 정월 날씨가 따뜻할 것이고 2월엔 농사일이 겹치니 정월보름께 일을 시키도록 하라."

그러자 예조에서 반대하고 나섰다. "정월에는 대중을 일으키지 말라 했습니다. 지금 백성을 움직여 운하를 파는 때가 경칩이 되었으니 중지하소서."

그러나 태종은 "운하를 파는 게 편하고 불편한 것은 의정부와 승정원이 이미 알고 있다"며 그대로 시행했다.

당시 경상, 전라, 충청도 3도 군인 등 5만 2천800명이 동원됐다. 그때 백성의 피와 땀으로 판 개천들이 청계천, 탄천, 안양천 등이다. 그게 개발시대에 뚜껑이 덮였다가 다시 되파여지면서 이명박 당선인의 청계천 신화로 이어졌다. 청계천 소운하를 파고 난 2년 뒤인 1413년에는 의정부 좌정승이 '숭례문(남대문)에서 용산강까지 운하를 파 작은 배를 오가게 하자'며 뱃길 운하 파기를 건의했다. '경기도 군인 1만 명, 군기감의 특별군 등 1만 1천 명을 징발하면 숭례문 밖에 운하를 팔 수 있다'고 한 것이다. 임금이 '우리나라 땅은 모래와 돌이 많아 물이 머물지 않으니 중국의 운하를 본받을 수 없다'며 경회루에 나가 의정부에 찬반 의견을 물었다. 여러 신하들이 운하를 파자고 했으나 의정부 찬성사 유양이 반대했다. '용산강은 도성과 가까운데 어찌 또 운하로 백성들을 괴롭히겠습니까.' 다시 찬성론자인 지의정부사가 나섰다. '숭례문 앞 땅이 무논이니 반드시 물이 새지만은 않을 것이고 산 뚫고 땅 파는 데는 1만 명의 한 달치 일을 넘지 않으니 시험해 보소서.'

그러나 태종은 불과 2년 전 하천 바닥 운하 파는 데 백성 인력을 동원했던 것이 부담돼 숭례문-용산 사이의 운하는 포기해 버렸다. 만약 그때 그 운하를 뚫었다면 서울역과 남대문 도심까지 한강 지류가 흐를 뻔했다.

찬성론자는 태종이 백성 동원 부담론에 밀리지 않고 밀어붙였더라면 오늘의 한강이 베를린、모스크바、파리처럼 支流(지류)들이 발달한 조화로운 도시가 됐을 것이란 평가도 한다.

590여 년 전 왕조시대의 운하논쟁을 되돌아보면 두 가지 敎訓(교훈)을 새길 수 있다. 어느 때나 찬반은 있기 마련이고 통치자는 양쪽 의견을 두루 듣고 백성의 땀과 희생을 염두에 두되 미래를 내다보는 큰 안목과 결단도 필요하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 이명박 정부의 운하 파기는 어떤 방향으로 결단을 내려야 할 것인가.

약 600년이 지난 지금도 일반 국민들은 대운하를 뚫는 게 이득인지 안 뚫는 게 나은 건지 알지 못한다. 그저 토목과 건설 분야의 CEO로서 청계천의 신화를 눈앞에 보여준 당선인의 경륜을 보고 '그가 된다고 하니 한번 믿어볼까'라는 기대를 갖고있는 정도다.

따라서 단순히 공약이니까 뚫어야 한다거나 당선됐으니 선거 때 내걸었던 모든 공약은 오류와 문제점이 있든 말든 밀어붙여도 된다는 식의 강자논리는 섬기는 정부의 자세가 못된다.

통치자가 나라의 큰일을 벌일 때는 항상 먼저 민심부터 얻어놓고 시작해야 한다. 청계천 신화도 왕조시대 조정 여론을 조정한 뒤 밀고나갔듯 주변상가의 상인들과 시민들의 이해와 공감을 얻어내고서 밀어붙였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 그렇게 보면 운하논쟁의 해답은 이미 590년 전에 나와 있는 셈이다. 국민들과 반대론자들이 '아 그래서 운하는 뚫는 게 좋겠구나'라고 공감할 정도로 설득시킨 뒤에 밀고 나가라. 그런 과정 없이 밀고가면서 국론만 흩트리면 아무리 좋은 국책도 실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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