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읽은 책 속에서 발견한 문구다. '인생이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죠. 운명의 갈림길에는 늘 누군가 타인이 서 있소. 그 타인이 제대로 된 사람이라면 문제가 없는데, 그게 꼭 그렇지만은 않소. 그 갈림길에 서 있는 인간은 신이 대충 성의 없게 정해주는 건지도 모르오. 그런 별 볼일 없는 인간에 의해 인생의 행로가 결정되고 마는 거요.'
돌이켜보면 그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면 지금의 내가 없었다고 할 만큼 고마운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놈만 없었어도 내 인생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거라고 평생 후회하는 경우도 있다. 살아가면서 만나는 사람 중에 누가 그런 사람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 인생의 무서운 부분이리라.
하이타니 겐지로의 '모래밭 아이들'과 만나게 된 계기는 지난해 대구의 한 공공도서관에서 열린 독서 토론회에서였다. 교칙은 필요한가, 이런 주제로 팀을 나눠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는데 듣고 있자니 그 책 내용이 무척 궁금해졌다. 사실 임시교사인 구즈하라 준이 그가 맡은 문제아들과 나누는 대화는 꽤 비현실이다. 우리와 별다를 것 없는 일본의 교육 현실에 비춰봐도 그렇다. 아이들이 가진 불만을 하나하나 들어주면서 대화로 풀어가는 장면은 소설 같은 일일테니까. 그러나 상냥한 문체와 구성이 좋았다. 마치 나이 지긋한 멘토가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이건 이렇게 생각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며 말을 건네는 듯하다. 구즈라하 준과 같은 멘토를 만난 것은 이 문제아들에게는 어쩌면 인생의 행로를 결정하는 갈림길에서 두고두고 고마운 사람으로 기억될 것 같았다. 그 이후 '모래밭 아이들'은 개인적으로 우리 선생님들에게도 일독을 권하고 싶은 목록에 남았다.
그런 그가 이번에 새 책을 냈다. '우리와 안녕하려면(하이타니 겐지로 글/양철북 펴냄)' 이라는 단편 소설 모음집이다. 일제의 조선침략, 2차 세계대전과 오키나와 학살(반전과 평화), 기성 교육 제도에 대한 비판과 저항, 가난과 약함 등 하이타니 겐지로가 살다 간 세상, 그의 삶과 철학을 관통하는 다양한 시선을 보여 준다. 지난해 암으로 세상을 떠난 그를 책으로 다시 만난다는 사실에 괜히 마음이 떨렸다.
'우리와 안녕하려면'에는 총 다섯 편의 단편이 실려있다. 분량이 줄고 호흡이 짧아졌지만 분명한 주제의식과 단편 영화를 보는 듯한 잔잔한 감동은 그대로다. 첫 편 '물 이야기'는 해산되는 수영부의 아이들이 느끼는 학교와 교사들에 대한 불만이 주된 소재. 이야기는 부원들을 배신한 것으로 간주되어 따돌림을 당하는 '이소순'의 아버지가 등장하며 더 넓게 진행된다. '남자'라고 표현되는 아이의 아버지와 아이들과의 수영시합이 전부인 짧은 이야기지만 이 속에는 해방 전, 일본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차별받았던 꿈 많은 한 조선 소년과 지금 아이들에게 따돌림을 받는 그 아들에게까지 이어지며 조용하게 마무리된다.
저자는 약한 것, 가난한 것에서 생명의 빛을 발견해 왔다고 고백한 바 있다. 지금 그 말의 의미를 되씹어 본다. 수많은 인생의 갈림길에서 강한 것과 풍요로운 것 대신 약한 것과 가난한 것으로 우리의 시선을 이끌어줄 그는 어디에 있을까. 그가 없었다면 지금의 내가 없었다고 감사하고 싶은 그를 어떻게 만날까.
최병고기자 cbg@msnet.co.kr
1. 하이타니 겐지로는 '나는 선생님이 좋아요', '태양의 아이', '모래밭 아이들' 등 교육 3부작을 펴냈다. 세 편을 관통하는 주제는 무엇일까.
2. '우리와 안녕하려면'에서 학교에 불만을 가진 아이들이 '그 남자'를 통해 세상과 화해하는 계기는 무엇이었나.
3. '10년 후', '마시멜로 이야기' 등 멘토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책을 더 찾아 읽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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