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슈 포럼] 챔피언의 죽음, 헛되지 않으려면

장기이식 사무실에 있다 보면 장기를 기증하겠다는 전화가 자주 온다. 그러나 대부분은 나이가 많거나 신체에 특별한 암 또는 폐렴 같은 전신 감염이 있어서 기증이 불가능한 경우다. 더더욱 환자의 병이 뇌의 병변이 아니면 뇌사가 아닌 심장사로 사망할 수밖에 없다. 시신과 각막 정도는 기증할 수 있다고 설명하면 가족들은 매우 난감해 한다. 환자의 뜻을 자녀들이 이뤄드리지 못했다고 죄책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장기를 기증받을 수는 없었지만 시민들의 관심이 높아진 것 같아 흐뭇하다.

그러나 아직도 기증 장기가 턱없이 부족해 장기이식을 기다리던 환자들이 대책없이 생을 마감하고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과거에는 기증할 수 없다고 여겨지던 고령 환자, 고혈압 등을 가진 뇌사환자, 심장정지 환자로부터 장기기증까지도 시행하고 있다. 인공장기 개발이 현재도 진행 중이고, 사람의 유전인자와 유사한 동물을 개발해 거부반응이 없는 장기를 만들어 이식하는 이종이식이 실험되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초기 심각한 거부반응과 예측 못한 바이러스 감염 등이 앞길을 막고 있다.

최근 한국 유일의 프로 복싱 챔피언인 최요삼 선수가 선수권 방어전 마지막 라운드 종료직전에 상대 선수로부터 불의의 일격을 맞아 쓰러져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대부분 관객들은 이제 최 선수의 판정승을 점치며 들떠있던 순간에 일어난 일이어서 무엇 때문에 최 선수가 쓰러졌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쓰러진 최 선수가 병원에서 뇌수술을 받고, 이후 뇌사 상태에 빠져 장기를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기증했다. 최 선수는 자신이 그처럼 원하던 한국 프로복싱의 중흥을 위해 몸을 던져 챔피언 벨트를 지켰다. 또 우리와 공간을 달리하기 직전 마지막 순간에 심장병 환자, 간 기능 부전환자, 신부전환자들에게 자신이 줄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을 놓고 떠났다.

최 선수의 장기기증 소식이 우리들의 마음을 뭉클하게 하는 것은 그가 온 국민이 알아주는 세계 챔피언인데다 마지막 경기장면이 너무 극적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뇌사판정 소식과 연이은 장기기증 소식은 어느 단체에서 실시한 장기기증 홍보보다 더 효과적이었다. 최근 일주일 동안 국민들은 뇌사, 장기기증 등의 의학전문 용어를 일상생활 속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여 사용했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 우리 국민들은 나도 언젠가 뇌사가 되면 나의 장기를 고통받는 환자들에게 나눠 줘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지 모른다. 의롭고 멋있는 행동에 대한 모방본능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회성 충동으로는 결심이 오래 가지 못한다. 이번 최 선수의 뇌사와 장기기증 뉴스도 길어야 일주일 정도 지나면 그 효력이 떨어질 것이다. 이런 사건들이 평생토록 기억 속에 남아 고통을 주는 것도 문제지만, 이번과 같은 최 선수의 미담사례는 오래 기억 속에 남아 있게 하고 싶다. 그리고 적당한 기회가 되면 이 일을 떠올릴 수 있게 했으면 좋겠다.

이를 위해서 반복적인 학습이 필요하다. 유사한 뇌사자 장기기증 뉴스를 신문 등에서 수시로 기사화해 주면 부스터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좀더 장기적인 안목에서는 학교의 교육과정을 통해 장기, 재산 등의 나눔을 교육하는 것이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했는데, 어릴 때 배운 지식을 성인이 되었을 때 직접 적용할 수 있도록 나눔과 희생의 삶을 교육해야 한다. 여기에 국가적인 계획이 필요하다. 한 사람의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는 국가라면 뇌사자 한 사람의 숭고한 생명 나눔으로 말기 병을 앓고 있는 여러 환자들의 삶이 다시 시작될 수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그 삶은 더 이상 병상에서 보호받는 나약한 삶이 아니라 이식받은 새로운 장기의 기능 회복으로 사회에 봉사하고 기증자에게 감사하며 살아가는 삶이다. 그리고 이런 생명 나눔은 말기환자의 치료에 투입되는 의료경비를 훨씬 절감시켜 줄 수 있다는 것이 또 다른 긍정적인 결과이다. 그래서 더욱 국가적 관심이 필요하다.

대부분의 임종경험자들은 죽음 직전, 의식이 가물거리며 꺼져갈 때 사람들과 주위 풍경들이 뒤로 물러나는 모습이 마치 활동사진을 거꾸로 돌리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한다. 최 선수를 링 위에서 마지막으로 지키고 있었던 사람에 의하면 쓰려졌던 그가 마지막으로 내뱉은 말은 '글러브를 풀어 달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더 이상 그 어떤 세상의 굴레에도 얽매이지 않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는 병상을 둘러싼 많은 사람들의 애도와 길게 늘어선 화환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가족 중 누군가의 귓전에 마지막 속삭임을 했을 것이다.

"더 주고 갈 것이 있는지 알아봐… 이제 떠날 시간이야."

조원현 계명대 동산병원 이식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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