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다민족 다문화 사회] ②외국인 근로자의 삶

"한국인 기피하는 궂은일 다하지만 우린 늘 이방인 신세"

외국인 근로자들은 이제 중소기업이나 3D 업종에서 없어서는 안 될 산업의 버팀목이다. 우리는 한국인의 삶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그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외국인이 아니면 일할 사람이 없어요. 보배 같은 존재죠. 하지만 믿고 맡기기는 어려워요. 미덥지가 않아요." 한 중소기업 사장의 말처럼 우리는 그들을 필요로 하지만 함께 나누기 싫은 '이방인'으로 보는, 이중잣대를 갖고 있다. 산업 현장에서 만난 외국인 근로자들은 예전보다 많이 나아졌지만 한국은 '차별과 냉대가 공존하는 먼 나라'로 기억하고 있었다.

▷수라디스·31·인도네시아·2007년 입국·선박부품공장

"예전 직장 동료들은 '너희 나라로 가라.'며 욕하고 위협하기도 했어요."

▷본반남·37·캄보디아·2003년 입국·자동차부품공장(산재로 휴직중)

"프레스작업을 하다 손가락 5개를 잃었어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요?"

▷지앙샤오윈·39·여·중국·2001년 입국·섬유(산재로 휴직중)

"구토에 머리가 아파 잠도 제대로 못자요. 일하다 다친 사실을 가족에게 알리지도 못했어요."

▷다비·34·스리랑카·2005년 입국·기계 자수

"한국에서 선진기술을 배우고 있어요. 앞으로 고국에서 제 꿈을 펼칠겁니다."

▷버티로·35·여·베트남·2004년 입국·섬유(비자 연장중)

"공장 일이 너무 힘들어요. 가족생계를 책임져야 하는데…"

◆어떤 일을 하나

수라디스 : 선박 부품을 만드는 회사에서 용접을 하는데, 회사 분위기가 좋다. 한국은 지난 1999년 처음 온 뒤, 이번이 세번째다. 그전에는 섬유·자동차부품 공장에서 일했다.

다비 : 3공단에서 기계자수 놓는 일을 한다. 12시간씩 일하는 것이 힘들지만, 요즘에는 일 잘한다고 나에게 믿고 맡기기도 해 신난다.

지앙샤오윈 : 섬유공장에서 옷감을 염색하는 일을 했다. 지난 6월 말 팔을 다쳐 일을 그만둔 상태다. 지금은 병원치료를 받고 있다.

◆한국에 왜 왔나

본반남 : 돈을 많이 벌기 위해서다. 캄보디아에 동생 5명이 있는데 공부와 결혼을 시켜야 한다. 식당을 차리려고 돈 벌러 왔다.

다비 : 스리랑카에서 기계로 자수 놓는 일을 했다. 한국의 선진 기술을 배우고 다양한 문화도 접하고 싶었다.

버티로 : 고향에 부모님과 8명의 형제가 있다. 베트남에는 일이 없어 먹고 살기 힘들다.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져야한다.

◆한국에서 일해보니…

수라디스 : 인도네시아의 대학에서 국어를 전공했다. 모든 일이 낯설고 힘들다. 예전에 일하다 다쳐 한쪽 손을 제대로 쓰지 못한다. 근무환경도 열악해 항상 긴장해야한다.

본반남 : 하루에 12시간씩 일했는데 노동강도가 너무 셌다. 작은 공장이다 보니 안전장비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다. 지난해 2월 프레스 기계에 오른쪽 손가락을 모두 잃었다.

지앙샤오윈 : 근무시간이 너무 많아 무척 힘들었다. 염색공장에서 처음 일할 때 화공약품을 가까이하다 보니 머리가 아프고 구토도 났다. 매일 약을 먹었지만 잠도 제대로 못잤다.

◆가장 힘들었던 적은?

버티로 :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15시간씩 서서 일한 적이 있다. 오래 서서 일하다 무릎 관절통에 걸렸다.

지앙샤오윈: 한국에 가면 사람들이 친절하고, 일거리도 많다고 들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800만 원 주고 왔는데, 한 달에 75만 원을 받았다. 불법체류자여서 2, 3년간 바깥 구경도 못했다. 말을 못한다고 무시해 혼자 많이 울었다. 손을 다쳐 손가락을 움직일 수 없지만 가족들에게는 알리지도 못했다.

수라디스 : 지금 다니는 회사 직원들은 이름을 불러줘서 좋다. 예전 공장에서는 '야! 임마''어이'로 불렸다. 동료들이 '너희 나라로 가라.'며 욕을 하고 위협하기도 했다.

다비 : 예전에는 욕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이젠 별로 없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잘사는 나라 사람과 못사는 나라 사람들을 대하는 것이 다르다.

◆하고싶은 일은?

수라디스 : 한국 치킨과 곰장어구이 맛에 흠뻑 빠져있다. 한국에서 당당히 살고 싶다. 돈도 벌고, 결혼도 하고 싶다.

본반남 : 다친 손 때문에 더 한국에서 일을 할 수 없을 것 같다. 한국인들이 못사는 나라의 외국인들을 무시하고 깔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한국 사람들도 외국에 가면 우리와 똑같지 않겠느냐.

지앙샤오윈 : 예전에 같이 일하던 아주머니가 한국말을 가르쳐 주고, 옷도 구해다 줬다. 나쁜 사람들도 많았지만 좋은 사람도 많다. 얼마전 남편이 중국에서 휴대폰 대리점을 열었는데 가족이 모여 살았으면 좋겠다.

다비 : 한국의 유명 상품들 중에는 우리 같은 외국인 노동자의 손을 거치는 것이 많다. 작지만 한국경제를 위해 일하고 있다고 생각해줬으면 좋겠다. 스리랑카로 돌아가면 한국에서 배운 기술을 활용해 회사를 차리고 싶다.

기획탐사팀=최두성기자 dschoi@msnet.co.kr 임상준기자 zzuny@msnet.co.kr

♠ "이젠 그들의 눈물 닦아줘야 할 때"

지난 한해 동안 대구외국인노동상담소의 이주노동자 상담건수는 3천 건이 넘는다. 일을 하고도 임금을 받지 못했다며 눈물을 흘리며 찾아온 노동자들, 일하다 다쳤지만 산재처리가 되지 않아 울먹이며 찾아온 노동자들이다.

상담소를 찾는 이주노동자의 수는 줄지 않고 있다. 하지만 이주노동자에 대한 사회 전반적 인식은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처음 상담소를 열 1996년만 해도 이주노동자들은 폭압과 폭력에 시달려도, 일한 대가를 제대로 받지 못해도 혹여 직장에서 쫓겨날까봐 사업주의 눈치만 봐야했다. 산재를 당하면 곧바로 귀국해야할만큼 그들에게 인권은 없었다.

그러나 서서히 그들도 불합리한 부분에 대해서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나라별로 네트워크를 형성해 정보를 나누고, 불합리한 것은 공동 대응하고 있다. 예전과 달리 그들을 건전한 노동자로 인정하고 있는 사업장도 생겨났다.

여전히 일부 사업주는 "외국인 근로자들이 도망갈지도 모르는데 돈을 줄 수 없다."며 2, 3개월 씩 체임하는 경우도 있다. '회사를 그만둔다.'는 게 아니라 '도망'이라고 표현하는 것만 봐도 그들을 자신의 노예처럼, 통제의 대상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의 법적 지위는 '불법'이다. 그들이 한국 여성과 결혼하고, 2세를 출산해 엄연히 우리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는 그들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제 우리는 이주민들에 대해 새롭게 인식을 해야한다. 그래야 우리와 우리 아이들이 그들과 함께 살아가고 미래사회에 닥쳐올 위험상황을 줄이며 통합된 사회를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들이 우리의 밥그릇을 빼앗아 가는 것이라는 인식부터 버려야한다. 이주노동자들을 다 돌려보내고 우리 국민의 노동만으로 한국의 경제를 뒷받침할 수 있을까. 미등록 이주노동자들도 쫓아내야하는 대상으로 볼 것이 아니라 세금과 주민으로서의 의무를 지키는 이들에게는 공동체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법적, 제도의 틀을 만들어야 한다. 적어도 우리 아이들이, 성실한 이주노동자의 아이들과 함께 일하며 살기를 바란다면 말이다.

대구외국인노동상담소 김경태 소장(목사)

♠ 산업연수생서 사업가 변신…스리랑카 출신 아누바마씨

"대구에서 희망을 키워갑니다."

아누바마(37·스리랑카) 씨는 잠시도 쉴 틈이 없다. 그의 전화기는 밤낮없이 울려댔다. 한밤중에 걸려오는 전화 때문에 잠을 설칠 때도 있지만 결코 귀찮아하지 않는다.

"얼마나 답답하면 새벽에 전화를 걸겠어요." 대부분은 한국생활이 서툰 스리랑카 노동자들이다. 아픈데 어디 갈지 몰라, 체불임금을 못 받아, 돈을 송금하고 싶은데 방법을 몰라… 사연은 갖가지다.

15년째 한국생활에 접어든 아누바마 씨. 지금은 원단과 중고컴퓨터를 수출해 연 3억 원가량의 매출을 올리는 사업가가 됐지만, 그도 산업연수생으로 처음 한국땅을 밟았을 때는 그들과 똑같았다. 그는 무뚝뚝한 겉모습과는 달리 스리랑카 출신들의 '큰 형' 역할을 하고 있다.

그는 1994년 대학 졸업 후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한국으로 왔지만, 외국인 산업연수생에게 돌아온 건 질시와 불평등이었다. 대구의 한 염색공장에서 하루 12시간 넘게 일했으나 사장과 동료의 욕설과 폭행에 1년 만에 공장을 뛰쳐나왔고 불법체류자가 됐다.

악착같이 한국어를 배웠다. 처음에는 외국인 근로자를 상대로 전화카드, 식료품 등을 팔면서 한국생활에 적응해갔다. 그는 스리랑카 근로자들이 늘기 시작하자 1990년대 후반 대구에서 스리랑카 공동체를 결성했다. 지금은 매년 4월 전국의 스리랑카 출신들이 대구에 모여 큰 축제를 열 정도로 모임이 확대됐다. 그는 지난 2004년 쓰나미(지진해일)로 폐허가 된 스리랑카 함반토타에 대구시민 성금으로 '대구랑카 교육센터(2006년 4월 개소)'를 건립하는 데 앞장서기도 했다.

그의 사무실은 북구 검단동에 있다. 최근 일거리가 많아져 자동차를 3대로 늘렸고, 직원 2명을 채용했다. 그는 "번 돈의 일부를 스리랑카 노동자를 위해 쓰고 있는데 좀 더 벌어야 한다."며 욕심(?)을 감추지 않았다. 그는 올해 내전으로 고통받고 있는 스리랑카 국민들을 위해 휠체어 기증 운동을 벌일 계획이다.

최두성기자 dschoi@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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