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강유정의 사랑한다면 이 영화를]어거스트 러쉬

천재 음악가의 '엄마 찾아 삼만리'

특이하게도 한국에서만 상업적 성공을 거둔 영화 '어거스트 러쉬'는 미국판 '엄마찾아 삼만리'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에는 미국에서는 잘 통하지 않지만 한국 관객에게는 설득력있는 몇몇 코드들이 있다. 첫 번 째는 우선 '천재'코드이다. 지금 방영 중인 의학드라마만 봐도 이런 현상은 바로 확인할 수 있다. 천재적인 실력과 직감을 갖춘 의사! 천재는 병원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음악 드라마라면 천재 음악가, 패션 드라마라면 천재 디자이너, 심지어는 베트남에서 아버지를 찾으러 온 여성은 천재 떡요리사로 변신 중이다.

두 번 째는 가족 상봉기이다. 한국 드라마를 보다보면 꼭 나오는 서사 중 하나가 바로 '출생의 비밀'이다. 알고 보니 사랑하는 남자가 이복남매이고, 죽도록 미워하는 회사 직원이 자기 딸이기도 하다.

경쟁 관계에 놓인 사람을 엄마가 몰래 버린 자식일 때도 있다. 도대체 살다가 이런 일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보는 것일까? 1만분의 1정도 확률의 사건들이 우리 방송 드라마 중 90퍼센트 이상이라는 것이 과연 정상적이기는 한 것일까?

만일 한국에서 방영되는 드라마의 이 지독한 우연성과 진부함에 넌더리를 내는 관객들이라면 '어거스트 러쉬'가 그다지 반가울리 없다. 그런데, 진부함은 한편 대중성의 다른 이면이 아니었던가? 진부하게 반복되는 이유 중 하나는 관객이, 비슷한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좋아하기 때문이다.

'어거스트 러쉬'의 흥행 역시 그렇다. '어거스트 러쉬'에는 말한 바 처럼 한국 관객이 좋아하는 두 가지 요소가 모두 포함되어 있다. 자신의 재능이 얼마나 놀라운지 모르는 천재와 출생의 비밀. 여기에 한 가지 요소가 부가되었다. 음악 말이다.

'어거스트 러쉬'는 부족한 개연성을 '음악'의 감흥으로 대체한다. 설명이나 논리가 필요한 순간 음악은 절정으로 달아오른다. 이 순간 요구되는 것은 영화에 대한 생각이 아니라 그 정서에 대한 공감이다. '어거스트 러쉬'는 이 공감의 순간을 조율하는 데 탁월하다.

진부한 소재이고 한편 너무도 우연투성이이지만 '어거스트 러쉬'는 관객의 호기심을 건드리고 기대를 유예하고 폭발적 만족을 주는 데 성공한다. 쥴리어드 음대에 우연히 입학하게 되어 자신의 천재성을 입증하던 '에반'이 갑작스럽게 거리로 되돌아가게 되는 순간이 특히 그렇다. 절정의 순간 영화는 지옥같은 인생의 쓴 맛을 보여준다.

관객은 '어거스트 러쉬'보다 더 간절히 그가 무대에 서기를 원한다. 이 이야기가 말이 되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다. 천재성이 입증 된 한 소년이 드디어 '희망'을 이룰 수 있는 순간이 지연되고 있기 때문이다.

지독한 우연과 끈질긴 관습성을 거쳐 '어거스트 러쉬'는 결국 가족과 상봉하게 된다. 관객들은 뿌듯한 마음으로 극장 문을 나서게 된다. 사람들은 이제 '희망'이 어두운 극장 안 스크린 위에서만 찾아 볼 수 있다고 여기는 듯 싶다.

그 '희망'이 말이 안되는 것들이라 할 지라도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싶어' 한다. 씁쓸한 신기루, 극장에는 불이 켜지는 순간 사라지는 그런 '희망'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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