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쁘세요? 시간 좀 내주세요." 평소와 다른 박의 목소리다. 심상치 않다. "그래 지금 와라" 부랴부랴 찻물을 올리고 돌아서는데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삐죽이 문을 밀고 들어서는 녀석, 처참한 몰골이다. 산발에 팅팅 부은 얼굴, 축 쳐진 어깨, 그렇지 않아도 액면가 중년인 모양새에 처량함마저 가득하다.
"왜 그리 다 죽어가는 사람 꼴이야, 바람맞았니?" 무심코 한마디 던졌는데 정곡을 찌른 모양이다. 피식 웃는 녀석의 한마디, "어떻게 아셨어요?" 그 나이에 바람맞은 것도 부끄러울 텐데 재롱까지 떤다. 가관이다.
바람맞은 사연이 구구절절하다. 십 수 년 총각생활에 바람이라는 바람은 종류별로 맞아보았지만 이번 같은 황당한 바람은 처음이란다. 객관적으로 보면 녀석은 듬직한 체격, 시원한 이마, 후덕한 인상, 안정된 수입, 축척된 자산까지 결혼시장에서의 기본요구조건은 다 갖추었다. 섹시함이 부족하다는 핑계에 대비해 얼마 전 얼굴을 가렸던 검은 뿔테 안경을 렌즈로 바꾸었다. 봉두난발 머리도 짧게 정리하고, 굵은 목에 목걸이까지 걸었다. 나름대로 완벽한 출전준비를 한 셈이다.
기회가 왔다. 모처럼 노총각 마음을 동하게 하는 규수의 등장. 예쁘장한 미모와 착한 마음씨, 그리고 여자다움까지 갖춘 팔방미인, 상대 역시 싫지 않은 눈치, 총각탈출의 희망작전을 전개했다. 우선 주위를 수소문하여 용한 철학관 몇 군데 찾아내었다. 두둑한 복채를 건네고 사주팔자와 궁합 조율까지 했다. 찰떡궁합, 몇 번이고 거듭 물어 확인을 했다. 이제 남은 것은 정면공격이다.
한 달 치 꽃다발을 미리 예약했다. 덤으로 케이크까지 세트로 주문했다. 매일 펼쳐지는 치밀한 배송작전, 퇴근시간을 계산하고 귀가시간까지 맞추었다. 가끔씩 이벤트로 감동까지 퍼부었다. 남은 것은 반지를 준비하는 일이고, 그럴듯한 분위기에서 '니 내꺼다' 최후의 일격을 가하는 청혼이다.
그런데,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진 것이다. "도대체 궁합이 뭡니까? 궁합!" 억울한 듯이 따져 묻는 녀석은 바람의 실체에 광분한다. 사연인 즉, 자기가 간 철학관은 열이면 열이 찰떡궁합이라고 하는데, 상대의 어머니가 간 철학관은 열이면 열이 결혼불가 판정을 내린다는 것이다. 더 한 것은 상대의 말, "어머니의 맹신에 가까운 철학관신봉을 져버릴 수 없어요."
넋두리하듯 중얼거리는 노총각 박, 애절한 질문을 계속한다. "궁합 그거 믿을 수 있어요?" "사이비 철학관 많지요?" "혹시 잘 아시는 철학관 없어요?"
이정태(경북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댓글 많은 뉴스
국힘 김상욱 "尹 탄핵 기각되면 죽을 때까지 단식"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민주 "이재명 암살 계획 제보…신변보호 요청 검토"
국회 목욕탕 TV 논쟁…권성동 "맨날 MBC만" vs 이광희 "내가 틀었다"
최재해 감사원장 탄핵소추 전원일치 기각…즉시 업무 복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