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최종문의 펀펀야구] 이승엽의 효심

지금도 그렇지만 이승엽은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도전 의식이 매우 강한 선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교 졸업후 프로가 아니라 대학 진학을 선택한 것은 오직 그의 효심 때문이었다.

이승엽이 경북고 2학년이었던 1993년, 이승엽의 부친인 이춘광 씨는 이미 활처럼 휘어진 아들의 왼쪽 팔을 의식해 프로 진출을 포기하고 대학 진학을 결정했다. 고교 시절 한때는 시속145km의 투구를 하기도 했지만 팔의 상태로 봐서는 투수로서의 전망이 밝지 않다고 생각했다.

프로에 가서 2, 3년 버티다 방출되느니 대학을 나오면 장래에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했던 것이다. 야구선수로서 멋지게 성공해 주면 참 좋겠지만 아들의 장래에 대한 부모님의 생각은 단호했다.

이 무렵 삼성 라이온즈에서 이승엽을 담당한 스카우트는 선수로 뛰다 89년 은퇴한 최무영 사원(현 운영팀장)이었다. 그는 이승엽이 성실하면서도 자질이 뛰어나 반드시 영입해야할 선수라고 보고서에 적었다. 이에 따라 구단의 내부 방침도 특별관리 대상으로 정해져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와 몇 차례 만나 본 결과 이미 정해진 진로를 재확인하는 게 전부였다. 자식을 향한 부모의 마음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이승엽은 너무나 매력적인 선수인 데다 스카우트로서 그의 첫 작품이기도 해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

1994년 여름이 시작되면서 그는 이춘광 씨의 집을 방문했다. 투수 뿐만 아니라 타자로서도 자질이 뛰어나니 아들의 대학 진학을 재고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처음엔 의례적인 방문이거니 생각했는데 점차 방문 횟수가 늘어나면서 아예 집으로 출근을 하는 것이 아닌가.

더구나 아침 식사도 같이 하면서 매번 자식을 칭찬해 주니 박대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침 방문을 거르는 날에는 저녁에 찾아와 일부러 귀가를 늦추어도 보았지만 어김없이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 이 씨가 지어준 최무영 스카우트의 별명이 '물귀신'이었다.

이렇게 해서 늦은 밤 중구 동인동 뒷골목에서 소주 한 잔을 놓고 이런 저런 야구 얘기를 하며 시간을 보내다 보니 입장은 달랐지만 서로를 깊이 이해하면서 정도 깊어졌다. 이승엽도 고교 선배이면서 가족 같은 최무영 스카우트를 자연스럽게 따르게 되었고 자신의 가치에 대해서도 새롭게 조금씩 재인식하게 됐다.

그러나 이 씨의 입장은 한결 같았고 부모의 생각에 이승엽도 묵묵히 따랐는데 결정적인 순간 마음의 동요가 생겼다. 한양대에 가입학한 이승엽이 접한 대학의 생활 모습이 기대와는 전혀 달랐던 것이다. 특히 술을 잘 마시지 않는 이승엽에게 주당인 선배들과의 술자리는 고역이었다.

회의를 느낄 즈음 이승엽은 최무영 스카우트에게 속 마음을 털어놓았고 자신의 미래를 진심으로 염려해주는 그의 자세에 마음이 흔들렸다. 결국 마지막 탈출구였던 '수능시험 36점 달성(?)'으로 부모님 뜻을 거스르며 운명처럼 프로가 되었지만 그는 지금도 홈런을 친후 하늘을 향해 제스쳐를 하며 변치 않는 효심을 내비친다.

최종문 대구방송 해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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