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츠 분더리히는 독일이 나은 20세기 최고 테너 중 한 사람이다. 그는 36세 생일을 일주일 앞두고 요절한 애석한 테너이다. 1966년 9월 7일 몰부론 부근 오버데어딩겐의 한 고성에서 돌계단을 헛디뎌 굴러떨어지는 사고를 당해 하이델베르그 대학병원으로 이송하였으나 두개골 파열로 타계하고 말았다. 그는 뮤니히의 발트프리도프 공동묘지에 매장되었다.
기록물을 보면 그의 친구가 울먹이며 비극의 현장을 소개하고 있다. 분더리히는 독일 리네 팔츠 지역 조그만 마을 쿠젤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바이올리니스트였고, 아버지는 합창지휘자였으나 분더리히가 5세 때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때는 1935년 세계적 경제공황시절 가족들의 생계는 어려웠다. 분더리히는 제과점에서 일을 하였다. 일하면서 부르는 노래소리를 듣고 이웃사람들이 그가 성악을 하도록 권유했고 지나가던 행인들도 아름다운 목소리에 매료되었다.
결국 프라이부르그 음악대학에서 장학금으로 공부를 시작했다. 어머니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음악 레슨을 했다. 그는 어렸을 적부터 아코디언 등 여러 악기 연주를 잘했다. 대학에서 혼 연주자가 되려고 하였으나 맹인 여선생 빈트벨트에게 발견되어 그녀의 지도를 받게 된다.
1955년 그는 학생들이 제작한 에 서게 되었다. 프라이부르그 음대를 1950년부터 5년간 다녔는데 이때 혼을 불며 늘린 긴 호흡은 그의 초인적인 호흡조절에 큰 도움을 주었다. 학생 오페라 를 마친 후 그는 슈투트가르트 부르템베르그 국립 가극장에 의 울리히 아이스링거로 데뷔한다. 당시는 이 가극장이 독일내에서 가장 유명했다. 테너 조셉 트락셀이 병이 나서 대역으로 슈투트가르트 가극장무대에 선 것이 계기가 되어 그는 새로운 스타가 되어 비록 짧았지만 놀라운 그의 경력이 시작된 것이었다.
그는 슈투트가르트 가극장의 매니저와 지휘자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여 1959년 뮤니히 가극장과 계약후에도 관계를 중단하지 않았다. 1959년 잘츠부르그 축제에 스트라우스의 오페라로 데뷔한 이래 생애 동안 모차르트 전문 가수로 높은 명성을 얻었다. 뿐만 아니라 바흐, 슈베르트, 말러 가곡에는 서정적인 찬란함과 부드러운 벨칸토로 가벼운 오페라에 출연했다. 대선배 타우버(1891~1948)와 슈미트(1904~1942)의 대를 이어 스트라우스, 레하르의 가곡을 즐겨 불렀다. 바바리아 국립 가극장 비엔나 가극장에서 활동하며 매년 잘츠부르그 축제에 참가했다.
1964년 성공적인 미국 연주여행을 끝내고 1965년 코벤트 가든과 에딘바라와 계약을 맺었다. 1965년 10월 8일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가극장에서 로 데뷔할 계획을 세웠으나 그 계획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1966년 9월 17일 사망했기 때문이다. 짧은 생애 동안 국제적인 스타가 되진 못했으나 점차 그의 명성은 전세계로 퍼지고 있다. 한번 그의 놀라운 음성을 듣고 나면 평생 그의 신봉자가 된다. 그의 목소리의 음질과 힘이 합하여 힘들지 않는 발성과 감동적 서정성은 오랫동안 만인의 심금을 울리게 될 것이다.
윤성도(시인, 계명대 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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