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상생의 땅 가야산] (27)옮겨진 비로자나불

사라진 법수사 인연 해인사로

가야산 자락인 성주군 수륜면 백운리 일대에서 융성하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법수사(法水寺). 그 절터에는 지금 석탑 하나가 달랑 남아 쓸쓸한 모습이지만 찬란했던 발자취는 곳곳에 남아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법수사 남서쪽에 있는 해인사(海印寺) 대적광전(大寂光殿)의 비로자나불상(毘盧遮那佛像)이다. 이 불상은 원래 법수사에 모셔져 있다 절이 폐사된 후 용기사를 거쳐 해인사로 옮겨졌다. 비로자나불상을 매개로 한국을 대표하는 사찰인 해인사와 지금은 그 흔적조차 희미해진 법수사가 '인연의 고리'를 맺고 있는 것이다.

대명당 터에 자리 잡았던 용기사!

법수사가 폐사된 것은 임진왜란 이후로 추정될 뿐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다. 임진왜란 때 절이 불타버렸고 그 이후 복원되지 않아 폐사가 되고 말았다는 얘기도 있다. 법수사에 모셔져 있던 비로자나불상과 문수보살상, 보현보살상은 절이 없어짐에 따라 가야산 골짜기 안에 있는 법수사의 부속 암자인 용기사(龍起寺)로 모셔졌다.

백운리를 출발, 용기골을 따라 난 등산로를 오르면 대피소가 나온다. 가야산성 남문 터에서 약 500m 정도 되는 지점이다. 이곳에서 왼쪽은 서성재로 가는 등산로, 오른쪽은 용기사로 가는 등산로다. 계곡을 따라 약 300m 정도를 오르면 허물어진 용기사의 축대가 나온다. 용기사 터는 평탄하고 기와 조각과 그릇 조각 등이 곳곳에 흩어져 있다. 가장 눈에 띄는 유물은 돌로 만든 석조(石槽). 큰 돌을 파서 물을 부어 쓰도록 만든 돌그릇이다. 임진왜란 때 이곳에 있던 승려와 백성들이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유물. 석조 외에도 돌로 만든 맷돌, 아궁이와 굴뚝 터도 보인다.

용기사가 창건된 시기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법수사와 같은 시기(802년)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성주군의 역사와 문화, 인물을 기록한 '성산지(星山誌)'에 용기사와 관련된 기록이 나온다. "기암절벽으로 둘러싸인 천 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용기사는 가야산중에 있다. 가뭄 때에는 이곳에서 기우제를 올리면 곧 뜻을 이룬다. 절터 앞 봉두에 한 쌍의 돌이 마주하고 있는데 이를 칭하여 용의 귀(龍耳)라고 한다."

용이 일어났다는 뜻을 지닌 용기사는 대명당 터로 널리 알려져 있다. 용기사 아래에 살던 사람들은 가뭄이 들 때면 용기사를 찾아 절터를 이리저리 살폈다. 절터가 명당이어서 조상의 유골을 몰래 묻는 사람들이 있었고, 이럴 경우엔 가뭄이 들었다는 것. 유골을 다시 파내고 기우제를 올리면 용기골을 내려가던 중에 바로 비가 내렸다는 이야기도 전해오고 있다.

용기사 동편으로 흐르는 계곡에는 용기폭포와 물탕이 있어 여름 피서지로 유명하다. 지금은 나무가 없어졌지만 옛날에는 용기사를 중심으로 수십 리에 걸쳐 아름드리 잣나무가 하늘을 가릴 정도로 무성해 잣수확 양이 엄청났다는 기록을 향토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진리를 상징하는 비로자나불!

'해인사지(海印寺誌)' 114페이지엔 용기사에 있던 비로자나불상을 해인사로 모신 연유가 나와 있다. "비로자나불상과 문수보살상, 보현보살상은 본래 성주군 금당사(金塘寺)에 모셨던 것인데, 금당사가 폐사될 때에 그 속암(屬庵)인 용기사에 옮겨 모셨다가 다시 용기사가 없어지므로 1897년 범운(梵雲)스님이 해인사로 옮겨 모신 것이다." 금당사는 법수사가 나중에 이름을 바꾼 사찰로 알려져 있다.

용기사에서 해인사로 비로자나불상 등을 옮겨 모신 시기는 1897년. 성주에서는 이와 관련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고개를 넘어 비로자나불상 등을 옮겨 모시던 중 갑자기 불상이 땅에 붙은 것처럼 꼼짝하지 않았다는 것. 범운 스님이 직접 달려나와 예불을 올리자 불상이 다시 움직였다. 해인사로 불상을 옮겨 모시는 것을 안타깝게 여겼던 성주 사람들의 마음이 녹아든 전설이란 생각이 든다.

비로자나불이 모셔져 있는 해인사 대적광전을 찾았다. 해인사는 화엄종(華嚴宗)의 근본 도량이므로 비로자나불상을 본존불로 모시고 있다. 비로자나는 산스크리트어인 '바이로차나'에서 온 말로 '영원한 법', 곧 진리를 상징한다. 비로자나불이 대적광토(大寂光土)에서 항상 계시면서 '화엄경'을 늘 설하고 두루 설하므로 화엄종에서는 비로자나불을 본존으로 한다는 것. 사찰의 주법당 이름은 그 안에 모셔진 주불에 따라 결정되는데 비로자나불을 모시면 대적광전이라 부른다. 석가모니불을 모시고 있으면 대웅전이 되고, 아미타여래불을 모시면 무량수전, 미륵불을 모시면 미륵전이 된다는 얘기다.

비로자나불상은 은행나무로 만들어졌다. 그 높이는 2.35m. 좌우에 있는 문수보살상, 보현보살상과 같은 은행나무에서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도 있다. 문수보살은 지혜를 상징하고, 보현보살은 실천을 통한 자비를 상징한다. 세 불상을 합쳐 대적광전비로자나삼존상이라 일컫는다. 본존불의 두부에는 중간계주와 정상계주가 표현되어 있고 법의(法衣)는 양 어깨에 걸쳐 입고 있다. 넓게 파인 가슴 안으로 옷자락이 들어가 있다. 특히 왼쪽 무릎을 흐르는 옷자락은 고려 중기 이후 조선 초에 유행하는 양식으로 불상의 조성시기를 가늠하는 단초가 된다. 손은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고 있는 모습으로 비로자나불이 취하는 일반적인 손모양인 지권인(智拳印)이다. 삶과 죽음이 하나이며, 땅과 하늘이 하나이고, 모든 만물이 하나로 통한다는 뜻이다.

글·이대현기자 sky@msnet.co.kr

박용우기자 ywpark@msnet.co.kr

사진·박노익기자 noik@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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