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 살 최은송 양은 영어 잘하기로 이미 소문이 난 아이다. 기자를 만나자마자 유창한 영어로 자기소개를 하는가 하면 영어 원서로 된 두꺼운 동화책 읽기를 즐긴다. 외국인을 만나면 먼저 알은 체하면서 대화를 건넬 정도로 영어회화에도 능통하다. 영어로 시(詩)를 쓰기도 한다.
하지만 은송이는 해외 여행은커녕 영어학원조차 다녀본 적이 없다. 외할머니 김신숙(56·경북 경주시 건천읍) 씨와 공부한 것이 전부다. 할머니는 외손녀를 어떻게 영어 천재로 키워냈을까.
"할머니도 우리 사회의 큰 자원이에요. 할머니를 잘 활용하면 인성은 물론 간단한 교육까지 챙길 수 있어요."
김 씨는 대뜸 '할머니 예찬론'을 펼친다. 최근 손자들의 육아를 떠맡는 할머니들이 많아진 데 반해 그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부족하다는 것.
할머니들도 사고방식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이 때문에 내 후기 인생이 발목 잡혔다.'는 생각을 바꾸고 '아이를 통해 뭔가를 이뤄내겠다.'는 적극적인 생각을 가지면 육아도, 교육도 마냥 즐거워진다. 김 씨도 이렇게 '생각의 전환'을 통해 50대 후반에 '초등학교 선생님' '인터넷 스타'에다 각종 자격증 보유자로 거듭났다. 이는 손녀 은송이를 키웠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가장 큰 변화는 평범한 주부였던 김 씨가 지난해부터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기 시작한 것. "은송이가 영자신문을 줄줄 읽는 것을 보고 학교 선생님이 권유했어요. 처음엔 자신이 없어 고사했지만 교장 선생님까지 격려해주셔서 시작했죠. 알파벳도 모르던 아이들이 몇 개월 만에 책을 읽는 것을 보면 보람이 커요."
김 씨는 이를 위해 한 사단법인체에서 발행하는(?) 교원자격증까지 땄다. 하는 김에 영어는 물론 국어·논술 지도자 자격증까지 따뒀다. 2003년엔 사이버주부대학에서 교육과정을 이수하고 2006년엔 영어 독서지도교실을 수료했다.
은송이의 성장에 발맞추기 위해 할머니의 공부도 끊임이 없었다. "작년엔 학부모 200명쯤 모인 곳에서 강의를 몇 번 했어요. 생전 처음 하는 강의였는데, 신나데요. 젊은 엄마들이 질문하면 답해주고, 정말 좋은 경험이었어요."
인터넷상에서도 '송이 할머니'라는 닉네임으로 인기몰이 중이다. "은송이의 영어학습법을 궁금해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 2005년 인터넷 카페를 열었어요. 은송이에게도 좋은 추억을 남겨주고 싶고요." 현재 김 씨의 인터넷 카페 '송이와 할머니'(http://cafe.naver.com/kss364.cafe)에는 1만 3천 명의 회원들이 가입돼 있다. 인기 영어교육 사이트 쑥쑥닷컴(www.suksuk.co.kr)에 웹 칼럼도 연재 중이다.
하지만 아이를 돌보며 교육에까지 신경 쓰기란 젊은 엄마들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다. 육체적으로 힘들지는 않을까. "비록 할머니이지만 일이 즐거우면 상상 이상으로 에너지가 나와요. '이 애를 어떻게 돌보지?'하고 근심스런 맘을 갖고 있으면 힘들지만 아이와 밀착해 즐겁게 놀아주면 그것도 재미예요. 어느 날 아이가 영어로 말하기 시작했을 때 그 희열감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죠."
은송이를 키우면서 김 씨는 모든 모임을 그만뒀다. 주변에선 '애 보면 겉늙는다, 왜 늙어가는 것을 자처하냐.'고 만류했지만 지금은 다르다. 초등학교 영어교사에다 인터넷 스타, 김 씨가 보유한 자격증 등을 보면 지금은 주변에서 오히려 부러워한다.
김 씨는 할머니라는 자원을 적극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할머니가 아이를 돌보면 인성교육은 저절로 되는 데다 숙제 정도는 봐줄 수 있다는 것. 무조건 학원으로 달려가는 것엔 반대다. "돈을 받고 아이를 바라보는 눈빛과 할머니의 눈빛은 근본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어요. 사랑이 전제된 교육은 좋은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지 않겠어요?"
'송이 할머니' 김신숙 씨는 아이에게 '영어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은송이가 생후 4개월 되던 때, 김 씨는 은송이에게 영어 동화 테이프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 김 씨의 영어실력은 30년 전에 멈춰져 있었고 쉬운 단어조차 기억이 가물가물한 정도.
영어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밤새워 영어 발음기호를 찾아 단어 밑에 적어두고 영어 카드를 만들었다. "엄마가 영어를 잘해야 아이에게 영어를 가르쳐줄 수 있다는 생각은 편견이에요. 엄마의 역할은 가르치는 게 아니라 그저 아이가 놀 수 있는 영어환경만 만들어주면 되거든요."
김 씨는 이런 원칙 하에 은송이에게 영어환경 만들어주기에 열중했다. 자기 전엔 영어동화를 들려주고 우유팩을 잘라 단어카드를 만들어 부직포에 붙이며 놀았다. 영어 동화책을 함께 읽는 것은 물론이고 인터넷을 통해 영어 동영상을 즐겼다. 동화 속 캐릭터들을 직접 그려 코팅한 후 영어로 대화하며 역할놀이를 하기도 했다.
단, 해석은 금물. 철저하게 '영어로 놀기' 원칙을 지켰다. 'What's this?' 'What do you see?'와 같이 간단한 영어 질문과 대답을 반복했다. "해석을 해주면 아이들은 한국말의 틀 안에 갇혀요.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원칙 중 하나죠."
어릴 때부터 영어로 된 동화책을 꾸준히 함께 읽는 것도 중요하다. 아이가 싫증을 낼 만하면 또 다른 책을 준비해 학습을 이어왔다. 지금은 원어민과 전화통화를 하는 학습 프로그램을 진행 중이다. 이때 전화받는 장소는 시장, 버스 안, 슈퍼마켓 등으로 다양화해, 다양한 주제의 대화가 가능하도록 유도한다.
김 씨는 은송이에게 한글 역시 같은 방법으로 가르쳤다. 김 씨는 '몇 가지 원칙만 지키면 영어놀이가 어렵지 않다.'고 강조했다.
#김신숙 씨의 영어교육 원칙
1. 해석은 절대 하지 마세요 = 아이에게 영어책을 보여주면서 절대 한국말로 해석해주면 안 된다. 그러면 아이는 영어를 온전하게 익힐 수 없다.
2. 영어 테이프 들려주기가 정말 중요해요 = 어른들의 발음은 아무리 연습해도 원어민과 차이가 있다. 좋은 영어 테이프나 시디를 들려주면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원어민 발음을 따라하게 된다.
3. 나선형으로 교육하세요 = 아이의 수준에 맞춰 조금 높은 수준의 책을 보여주다가도 다시 쉬운 단어, 책 수준으로 내려와 밑바탕을 잘 다진다. 이렇게 반복해가다 보면 잘 다져진 실력 위에 아이의 수준도 높일 수 있다.
4. 목표를 정하세요 = 김 씨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영어 동화책을 보면서 '은송이가 원서의 감수성을 그대로 느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꿈을 품었다. 이처럼 목표를 분명하게 정하는 것이 좋다.
5. 인터넷을 적극 활용하세요 = 김 씨가 인터넷을 이용한 결론은 '영어를 배울 수 있는 모든 프로그램이 완벽하게 있다.'는 것. 김 씨는 쑥쑥닷컴(www.suksuk.co.kr), 리틀팍스(www.littlefox.co.kr), 키다리샵(www.ikidari.co.kr), 콜 스터디(www.callstudy.co.kr), 인북스(www.inbooks) 등을 적극 활용한다.
최세정기자 beaco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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