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휘자의 창조 공간은 손끝에서 시작된다. 대부분의 오케스트라 지휘자들과는 달리, 합창 지휘자는 '손끝'의 움직임이 사실상 전부나 다름없다. 이들은 아주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거의 지휘봉을 잡지 않는다. 단원들의 마음을 움직여 노래로 이끌어 낸 뒤 관객들의 마음속으로 전달하는 것이 합창 지휘자의 중요한 역할이기 때문이다.
오케스트라 지휘에서 정확한 '템포'와 '비트'가 핵심이라면, 합창 지휘에서는 '터치'가 생명이다. 불과 20여 년 전만 하더라도 합창 지휘자들에겐 성냥곽만한 공간만 허용했었다. 엄격한 형식주의와 지휘자의 권위를 강조하던 시대적 산물이랄까. 그러나 요즘에는 두 팔을 다 벌린 크기의 공간까지 허락하는 분위기다. 그만큼 지휘자의 자유공간이 커진 셈이다.
비록 손끝이라는 작은 곳에서 출발하지만, 그의 공간은 무대와 객석, 그리고 관객의 마음으로 끝없이 확대된다. 그 속에는 예술적 감동이 흐른다.
깜깜한 무대. 고요와 적막을 뚫고 일순 드리워진 밝은 빛을 따라 지휘자의 가슴에는 별처럼 반짝이는 해맑은 미소들이 쏟아져 들어온다. 순수하고 맑고 깨끗해서 편견과 선입견의 여지가 없는…. 그 미소들은 지휘자의 손끝 표정에 모든 것을 맡긴다. 매 공연 때마다 겪는 이 순수 영혼과의 첫 만남은 소년소녀합창단 지휘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자 감동이다.
"노란색 물감의 붓으로 지휘하면 노란색으로 바뀌고, 연녹색으로 지휘하면 무대는 연녹색 공간이 됩니다. 성인 합창단에선 경험하기 어려운, 영혼이 맑은 소년소녀합창단에서만 느낄 수 있는 축복입니다."
지휘자와 맑은 영혼의 단원들이 창조해 낸 무대는 생명의 공간이기도 하다. 생명에는 호흡이 따르고, 호흡으로 연결된 음악은 지휘자의 손끝을 따라 영혼을 '터치'하는 감동으로 이어진다. 그 손끝은 '터치' 육안이 아니라, 마음의 눈이다.
수년 전 대구시립소년소녀합창단에서 시각장애우 단원을 선발했을 때, "앞을 못 보는데, 어떻게 지휘자의 지휘에 따라 노래를 부를 수 있나?"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그때 시각장애인 소년은 "지휘자 선생님의 움직임을 귀와 마음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라고 말했다.
이 소년이 연주회에 출연, '나의 눈 열어주소서'를 열창하자 관객들은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손끝에서 출발한 지휘자의 공간이 무대와 객석을 넘어 관객의 마음에까지 일파만파 펼쳐진 순간이었다. "소년소녀합창단의 경우 특히 지휘자와 단원들 간 영혼과 마음의 교류가 중요합니다." 이재준(50) 상임지휘자의 두 손은 결국 영혼의 소리를 이끌어 내는 또 하나의 작은 우주 공간인 것이다.
석민기자 sukmi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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