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주말]느림이 불편함? 슬로우 시티를 찾아서...

자연에 대한 인간의 기다림

"천천히, 느리게 사는 게 행복한 삶이다."

가랑비가 땅을 적시는 날이면 답답할 정도로 느릿느릿 비를 피하는 달팽이의 걸음에서, 아지랑이 피는 봄날, 들에서 쟁기를 끄는 소의 우직한 걸음에서 배울 것이 하나 있다.

느림의 미학이 그것이다.

아무리 꼬물대고 느린 걸음이지만 결국 달팽이는 비를 피하고 소는 넓은 논의 이랑을 모두 메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바로 이 느림의 미학을 생활에 도입, 공해 없는 자연환경 속에서 고유의 먹을거리와 문화를 향유하며 인간적인 삶을 추구하자는 것이 '슬로우 시티(Slow City)'운동이다.

바쁜 도시생활과 반대되는 개념인 슬로우 시티 운동은 이탈리아의 소도시 '그레배 인 키안티'가 진원지. 1999년 당시 시장인 파울로 사투르니가 "빨리 빨리 살 것을 강요하는 현대생활은 인간을 망가뜨리는 바이러스"라고 주장하며 마을사람들과 세계를 향해 "느리게 살자"고 호소하면서 시작됐다.

정신없이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의 삶을 반성하고 획일적이며 대량생산된 문명의 이기(利器)를 떠나 느긋하게 사는 법을 실천할 때 참다운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생각은 곧장 호응을 얻으면서 유럽으로 퍼져 갔고 지난 달 초 아시아에선 최초로 전라남도 담양, 장흥, 완도, 신안 등 4개 군이 슬로우 시티로 지정됐다.

급하게 사는 것보다 천천히 살며 이웃과 더불어 자연과 인간의 조화로운 삶을 지향하는 슬로우 시티 운동은 그래서 '불편함이 아닌 자연에 대한 인간의 기다림'을 주제로 한다.

동편으로 월봉산과 남쪽으로 국수봉이 봉황의 날개마냥 마을을 감싸 안고 앞에는 삼지천이 유유히 흐르는 담양군 창평면 삼천리 삼지천 마을.

장흥 고씨 집성촌으로 현재까지 후손들이 거주하면서 관리하는 100년 가까운 전통가옥과 마을을 미로처럼 에두르는 돌담장, 순박한 인심, 너른 들녘에서 나는 다양한 농산물이 '느림의 철학을 바탕으로 한 청정지역'임을 인증 받아 지난 달 1일 슬로우 시티로 지정됐다.

◆눈높이에 맞춘 돌담장 길

마을초입, 하얀 잔설이 내려앉은 작은 기와가 앙증스런 돌담장은 낯설음 보다 정겨움이 앞선다. 총길이 2km가 넘는 마을 돌담장은 또한 저마다 가느다란 가지들이 얼키설키 엮인 담쟁이덩굴을 이고 있다.

담장 너머로 흘겨본 마을의 한 전통가옥 안은 겨울햇살이 살포시 비추는 툇마루에서 고부간인 듯한 두 여인이 오가피나무를 손질하고 있다. 마당 한 켠 파란 하늘을 향해 가지를 뻗은 앙상한 감나무가 말없이 이들을 지켜보는 가운데 땅에서 얻은 소중한 수확물을 천천히 다듬는 풍경은 햇빛만큼이나 따사롭다.

삼지천 마을의 전통 기와가옥은 모두 11가구 20여동. 대부분 1900년대 초에 지어진 것들이어서 낡은 모습이 완연하지만 나름의 고색창연한 멋을 풍기고 있다.

특히 고재선(高在宣) 씨 가옥은 사랑채와 안채를 낮은 담으로 막은 후 중문을 낸 전형적인 남도 상류층의 주거양식을 엿볼 수 있다. 안채 뒤쪽은 대나무 숲이 병풍처럼 집을 감싸고 있다. 마을의 한옥체험 민박집은 마당넓이만 900여 평에 달하고 초가집을 개축한 이층 기와집 모습도 보인다.

이 때문에 마을에 들어 돌담장을 중심으로 전통가옥의 지붕선과 집집마다 한 두 그루 씩 심겨진 감나무를 경계삼아 360도 시선을 돌리면 멀리 마을 안고 있는 산봉우리들이 각각 소실점이 되면서 원근감이 살아있는 한 폭의 그림이 펼쳐진다.

◆자연과 함께 하는 순박한 삶

슬로우 시티 인증의 중요한 조건 중 하나가 고유의 특산물을 생산하거나 이의 가공을 통한 주민 소득의 향상이 따라야 한다는 점이다.

삼지천 마을은 이런 조건에 걸맞게 딸기, 토마토, 고추, 포도 등 계절별 특산물과 쌀, 보리, 참깨, 마늘 등 농산물을 연중 재배해 출하하고 있을 뿐 아니라 마을 전통의 쌀엿과 한과, 죽염 된장 등의 특산품을 생산하고 있다.

지리적 여건 또한 노령산맥의 지맥인 무등산 능선을 따라 산과 내, 들이 잘 발달돼 있어 농사짓기에 안성맞춤이며 교통의 요충지로써 도시근교 시설원예가 덩달아 발달해 있다.

특히 마을의 약 15가구가 매일 저녁 뽑아내는 전통 쌀엿은 인근에 유명세를 타고 있어 별도의 판매장 없이도 알음알음 전화주문이 밀리는 상태에서 농가 부수입 또한 여느 마을보다 높은 것이 특징이다.

이 때문에 마을엔 현재 86세의 최장수 어른인 김애순 할머니를 필두로 마을주민 대부분이 70세 이상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왕성한 경제활동을 하고 있다.

문화적인 면에서도 삼지천 마을은 국문학사에 이름을 남긴 면앙정 송순과 송강 정철의 가사 문학과 많은 시인묵객이 터를 잡고 주옥같은 작품들을 남긴 면앙정, 송강정, 식영정, 소쇄원 등 인근에 문화유적이 산재해 있어 유서 깊은 곳이기도 하다.

우문기기자 pody2@msnet.co.kr

사진·정재호 편집위원 newj@msnet.co.kr

◇삼지천 마을 가는 길=88고속도로 담양IC에서 직진 하다 첫 네거리에서 왼편 광주·창평방면 29번 국도를 약 5분 정도 달리면 삼거리가 나온다. 이 곳에서 이정표를 따라 좌회전하면 역사와 전통문화가 살아 있는 삼지천 마을이 나온다.

▩슬로우 시티에 가입하려면=슬로우 시티로 지정받으려면 슬로우 시티 국제연맹본부의 현지 답사를 거쳐 일정기준을 통과해야 인정을 받을 수 있다.

가입 조건은 우선 고유의 전통문화와 토착음식이 있어야 하며 유기농과 특산품 및 공예품을 자체 생산하고 자연환경이 잘 보존돼 있음을 전제로 한다. 일단 가입이 되면 세계 100여개 도시와 글로벌 네트워크가 형성되면서 지역 자원의 브랜드화가 가능하고, 이를 관광상품과 연계할 경우 주민 소득향상에도 큰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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