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강유정의 사랑한다면 이 영화를]권태

누구나 다 가질수 있지만...아무도 가질수 없는 여자(?)

알베르토 모라비아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권태'는 사랑을 우스꽝스러운 욕망의 희극으로 보여준다. '권태'에 등장하는 여성캐릭터는 영화 속에서 그리고 문학 속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매우 독특한 개성을 지니고 있다. 그녀의 개성은 '욕망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욕망없는 인간이라는 게 가능하기는 한 것일까? 그녀의 행동을 살펴보면 이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될 것이다.

그녀는 원하면 다준다. 시도 때도 없이 무조건 다 준다. 그녀에게는 그다지 중요한 것도 소중하게 간직해야 할 것도 없다. 모욕을 주고 멸시를 해도 그녀는 표정의 변화조차 없다. 가라고 하면 가고 오라면 온다. 그러면 도대체 무엇이 문제일까? 문제는 그녀는 모든 남자에게 똑같이 이 모든 것을 허용한다는 것이다. 누구나 다 가질 수 있지만 아무도 가질 수 없는 여자, 그녀가 바로 '세실리아'이다.

'권태'에는 욕망은 정신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것이라고 믿는 철학자가 등장한다. 그는 손가락크기만한 성기에 휘둘리는 사람들을 열등한 존재들이라고 비아냥거린다. 그런데 세련된 철학으로 무장한 이 남자 앞에 열일곱 살의 소녀가 등장한다. 가슴과 엉덩이만 비정상적으로 발달해 보이는 소녀는 그렇게 예쁘거나 섹시하지 않다. 그녀는 백치같은 눈빛과 색정적인 가슴을 소유하고 있다.

보티첼리의 그림 속에서 걸어 나온 것처럼 퉁퉁한 몸매의 소녀에게 신기한 점이 있다면 노화가의 연인이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노화가는 소녀와 정사를 나누다가 죽었다. 궁금증에 시달리던 남자는 세실리아에게 데이트를 신청한다. 소녀는 흔쾌히 그러겠노라고 이야기한다. 남자는 매주 월요일 한시에 자신의 아파트로 찾아오라고 요구한다. 세실리아는 그렇게 매주 월요일 한시에 마르땅을 찾아온다. 아파트에 들어서자 마자 소녀는 옷을 벗고 침대에 뛰어든다. 그녀는 전희도 필요 없다는 듯이 마르땅의 품에 파고들어 열심히 섹스를 나눈다.

영화 '권태'에서 가장 흥미로운 장면 중 하나는 둘의 관계가 역전되는 장면이다. 상처를 주고 싶어 안달이 난 마르땅은 그녀에게 헤어지자고 말하리라 다짐한다. 그런데 막상 정해진 시간에 그녀가 오지 않자 마르땅은 하루 종일 전화기 앞에 붙어서 전전긍긍한다. 갑자기 상황은 역전되고, 준비했던 선물은 그녀를 붙잡기 위한 뇌물로 바뀐다. 상처받는 쪽은 되려 마르땅이다.

이탈리아어로 '실리아'는 성녀를 의미한다. 그런데 어떻게 이 헤픈 여자가 성녀라고 불릴까? 그녀를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어마어마한 규모의 유산을 다 준다고 해도 거절한다. 결혼 따위는 생각도 없다. 그녀는 '여자'라고 통칭되는 사람들이 원하는 보편적인 것들을 거부한다. 도대체 모르겠다. 그래서 그녀는 마치 살아있는 물음표처럼 난해하다.

누군가는 이런 세실리아를 보며, '호수같은 여자'라고 표현했다. 나만 비추는 줄 알았더니 들여다보는 모든 사람의 얼굴을 비추는 여자, 들여다봐도 나밖에 안 보이는 여자라는 의미로 말이다. 세실리아는 원할 때마다 가질 수 있는 여자지만 결코 그만의 것이 될 수 없는 여자이다. 남자는 이 기묘한 사랑의 게임 앞에서 점점 미쳐가고 바보가 되어 간다. 세실리아에게는 마음도, 욕망도 그리고 그 회로도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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