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겨울, 독서의 계절

흔히 가을을 독서의 계절이라 한다. 그러나 알고 보면 가을보다는 겨울이 책 읽기에 훨씬 더 좋은 계절인 것 같다. 길고 추운 겨울 밤, 군밤이나 군고구마, 바삭바삭한 누룽지 같은 간식거리를 곁에 두고 난로 옆이나 따뜻한 이불 아래서 한 권의 책을 뒤적이는 재미, 이 재미를 다른 어떤 오락거리에 비교할 수 있을까….

독서는 산책의 길이며 먼 여행길이라고 한다. 심지어는 순례의 길이라고도 한다. 왜냐하면 독서는 문자의 행간을 산책하면서 자신의 내부를 발견하고, 세상을 관찰하고, 미지의 먼 곳과 무한한 지식의 세계로 여행을 떠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늦은 밤, 가장 편안한 자세로 의자에 기대거나 혹은 침대머리에 기대어 책을 읽다보면 복잡한 세상사도 고단했던 하루도 잊어버리고 영혼은 어느새 몸을 빠져나와 다른 세계 속을 헤매게 된다. 밤이 얼마나 깊었는지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도 모르고, 문득 시계를 쳐다보고서야 깜짝 놀라 내일을 위해 부랴부랴 불을 끄고 잠자리에 들게 된다.

탐서와 탐독은 어느새 책과 사랑에 빠졌다는 말이다. 그래서 어떤 이는 독서를 고혹의 여인과 운명적인 사랑에 빠지는 것으로 비유했다. 고요하고 적막한 겨울밤, 불을 밝히고 중얼중얼 책을 읽다보면 책이야말로 언제나 나와 함께하고 늘 내 곁에서 나를 섬기며 나를 즐겁게 해주는 애인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한데 이 애인은 절대 변심을 하거나 한눈을 팔거나 돌아서지 않는, 세상에서 가장 믿음직한 연인이다. 많고 많은 사랑 중에서도 책과의 사랑은 어떤 사랑보다 지속성을 가지는 것이며, 누구도 끼어들어 방해하지 못하는, 서로 상처 주거나 상처 받지 않는 유일한 사랑이 아닐까? 그래서 책은 그 자체로 하나의 존재로까지 승격되는 것이다.

탐독은 탐식과도 비슷하다. 하지만 이 탐식은 다이어트가 필요 없는 정신의 보양식이요 건강식이다. 옛 선비들처럼 책 앞에 앉아 의관을 정제하지는 않더라도 긴 겨울밤, 부자 되는 법, 부동산 투자 지침서 같은 책 대신 영혼을 풍족하게 할 한 권의 책을 골라 천천히 책 속의 길을 산책해 보자. 메마른 가슴 속으로 한 권의 책을 맞아들여 운명적인 사랑에 빠져보자.

아름다운 여인이 옷장을 정리하고 옷을 꺼내 입어보면서 새 계절을 단장하듯이, 먼지 앉은 책장을 뒤지면서 봄 맞을 채비를 하는 것도 이 겨울을 보람 있게 보내는 한 가지 방법이 될 것이다.

서영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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