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차명계좌 때문에 노령연금 못받는 노인 많다

최근 기초노령연금 수령 통장 계좌 변경 신고를 위해 동주민센터를 찾은 K씨(73)는 깜짝 놀랐다. 별다른 노후 대책 없이 가족들의 도움으로 생활하던 K씨의 명의로 2억 원이 넘게 예치된 통장이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는 것. K씨는 가족들에게 물어봤지만 누구도 출처를 알지 못했다. 결국 금융감독원과 경찰에 도명계좌로 신고를 한 뒤에야 K씨는 전직 판사 출신의 친구가 몰래 통장을 개설해놓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K씨의 친구는 은행에서 별다른 신분확인 절차도 거치지 않은 채 지난해 4월 K씨의 인적사항을 이용해 통장을 만들었고, 매월 71만 9천 원의 이자수입을 올리고 있었던 것.

문제는 그 뒤였다. K씨는 자신 명의로 된 현금 자산이 확인되는 바람에 기초노령연금을 받을 길이 막힌 것. 일종의 도명계좌지만 친구를 고발해 입증서류를 마련하거나 현금의 자연 감소분으로 수급기준을 맞출 때까지 연금 수령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K씨는 "친구가 몰래 만든 계좌 때문에 연금 수령 기회가 날아갔다."며 "친구를 고발할 수도 없고, 연금을 내놓으라고 할 수도 없어 난감하다."고 하소연했다.

지난해 11월 기초노령연금을 신청했던 L씨(74·여)는 자녀의 차명 계좌 때문에 연금 수령이 어렵게 됐다. 금융권에서 일하는 L씨의 아들이 남몰래 주식 거래를 하기 위해 L씨 명의로 증권 계좌를 만들었던 것. 금융 정보 조회로 L씨의 계좌에 9천400만 원이 예치돼 있는 것이 확인됐고, 결국 월 40만 원으로 제한된 소득인정액을 초과해 연금 받기를 포기해야 했다.

기초노령연금을 신청한 노인 중 상당수가 자녀나 친지, 지인의 차명계좌 때문에 연금 지급 '미해당'으로 분류돼 울상을 짓고 있다. 자녀나 지인이 노인을 대상으로 한 은행권의 비과세상품이나 증권 계좌를 차명으로 만들었다가 애꿎은 노인이 노령연금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

대구 구·군에 따르면 지난해 11월 말 현재 기초노령연금 신청자 중 미해당으로 분류된 사람은 모두 1만 2천918명으로, 전체 신청자 9만 4천200명 가운데 13.7%나 됐다. 이들 중 상당수가 자녀나 지인, 친지에게 예금·증권 계좌를 만드는 데 자신의 명의를 빌려줬거나 아예 모르는 사이에 도명계좌가 만들어진 경우라는 게 구청 관계자들의 얘기다. 65세 이상을 대상으로 한 은행의 비과세 상품을 이용하기 위해 노인 명의로 통장을 개설했거나 공무원이나 은행 직원 등 주식거래가 여의치 않은 자녀 등이 차명으로 증권 계좌를 개설한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

그러나 이들이 구제받기는 사실상 어려운 형편이다. 금융실명법상 차명계좌나 도명계좌는 엄연한 불법으로 모두 노인 당사자의 소득으로 간주되기 때문. 구제를 받으려면 해당 계좌가 차명이나 도명계좌라는 입증 서류를 제출하거나 의료비·생활비 등으로 인해 수급 기준액보다 현금 자산이 줄어들어야 한다. 그러나 월 4만~8만 원의 노령연금을 받기 위해 이들을 고발할 수도 없고, 소득의 자연감소분은 단독가구는 월 60만 원, 부부는 월 100만 원까지만 인정되기 때문에 차명계좌의 재산이 많을수록 연금 수령이 멀어진다는 것이다. 한 구청 관계자는 "부모를 부양하고 사는 자녀의 경우 은행의 비과세 상품을 이용하기 위해 명의를 부모님 앞으로 해놓는 경우가 많다."며 "차명계좌는 무조건 노인 재산으로 인정되는데도 자신의 재산이 아니라며 하소연하는 노인들이 끊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장성현기자 jackso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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