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문학기행] 김원일의 '노을'

이제는 찬란한 무지갯빛 노을이…

▲ 김원일 문학비
▲ 김원일 문학비

그의 눈에 비친 하늘은 분명 어둠을 맞는 핏빛 노을이 아니라 내일 아침을 기다리는 오색찬란한 무지갯빛이리라. 그와 마찬가지로 지금 차창 밖을 내다보고 있는 현구의 눈에 비친 아버지의 고향도 반드시 어둠을 기다리는, 그런 상처 깊은 고향이기보다는 내일 아침을 예비하는 다시 오고 싶은 고향일 수도 있으리라.(김원일 '노을' 부분)

김해시 진영읍이 배출한 김원일의 문학비에 새겨진 '노을'의 마지막 부분이다. '노을'은 붉은색이다. 그런데 잘 들여다보면 노을에 붉은색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규정짓기를 좋아한다. 인간에 대한 판단도 마찬가지다. 모든 인간은 다양한 생각을 지니고 삶을 살아가는데도 너무도 쉽게 이런 사람이라고 규정해 버린다. 그러나 '노을'의 주인공은 앞으로는 그렇지 않으리라 믿는다. 상처의 가장 중심에 있었던 옛날의 노을이 지금 자신의 앞에 그 모습 그대로 존재하는 것처럼 상처를 안으로 안고서 치유하지 않고 피한다고만 해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걸 인식한다. 결국 김원일의 '노을'은 상처를 말하는 소설이 아니라 그 치유의 방식을 제시하는 소설이다.

해방 후 좌우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말미암아 빚어진 남로당 폭동과 그 폭동에 가담한 아버지로 인해 입은 어린 시절의 상처를 평생 안고 살아가는 주인공 김갑수. 중년이 된 그가 고향으로 돌아가 자신의 뿌리를 확인하고 자신의 상처와 맞대면함으로써 그 상처를 치유해내는 모습은 남북분단의 비극을 더 큰 사랑과 생명력으로 껴안아 극복하려는 소설가 김원일의 그것과 동일하다. 소설이라는 양식의 특성상 작가의 체험이 녹아든 작품이 한둘은 아니겠지만 다른 작가들에 비해 김원일의 유년기 체험은 그의 소설의 본질이다. 특히 어릴 때 살았던 '진영'은 김원일 소설의 시작이자 끝이다. 친구가 그에게 이제 진영 얘기는 지겨우니 그만 쓰는 게 어떠냐고 말하자 "그렇지 않아. 내게는 그것밖에 없어. 내 소설 중 단 한 편의 소설이 남을 수 있다면 그것뿐이니까."라고 대답할 만큼 절대적이다.

푸름과 붉음의 대립 구조는 20세기 현대사가 만들어 낸 가장 기본적인 대립 구조이다. 그러한 대립 구조는 한국 현대사를 비극으로 점철시켰다. 그러나 더욱 비극적인 것은 많은 존재들이 그 본질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비극적인 역사의 거대한 흐름 속에 침잠되어갔다는 사실이다. 가진 자는 푸른 색, 가지지 못한 자는 붉은 색이라는 이분법은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구분이었다. 본질을 알고 그 속에서 몸부림을 친 것이 아니고, 색깔의 겉모습만을 보며 그 가장자리에서 허우적대었던 수많은 존재들. 어쩌면 푸름과 붉음의 본질적인 대립에 의한 아픔보다는 그러한 무지에서 확산된 아픔이 더 본질적인 상처로 우리 민중들에게 다가오기도 했다. 그들에게 그것은 생존 그 자체이기도 했다.

사실 당시 대부분의 민중들은 선택의 길이 막혀 있었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지 그들에게는 절망만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밤과 낮의 주인이 다른 세상, 그런 중립 지역에 대부분의 민중들이 있었다. 조정래의 '벌교'가 그랬고 김원일의 '진영'이 그랬다. 그들은 양측에 의해 죽음을 당했다. 그리고 상처가 남았다.

김원일은 그러한 상처에 정면으로 대응한다. 이미 그 상처는 사라져 간 사람들의 몫이 아니라 남아있는 사람들의 몫이라는 걸 안다. 소설 속에서 좌익 아버지의 아들인 이치모가 주인공 갑수에게 던지는 메시지, '그러나 피맺힌 상처긴 해도 인자 와서 그걸 우짜겠습니껴. 자가 처방으로 치료할 수밖에 없고, 나아가서는 그 비극을 사랑하도록 노력해야 되잖습니껴?'(김원일 '노을' 부분)라는 말은 그래서 더욱 문제적이다.

이제 김해시 진영읍 어디에서도 과거의 아픔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덩그러니 서 있는 문학비조차도 애처롭다. 진영을 등지고 마산으로 향하면서 국도변에 걸린 지치도록 아름다운 노을을 오랫동안 지켜보았다.

한준희(경명여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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