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연초에는 술자리가 참 많다. 그럴 때마다 터져 나오는 건배사는 시대정신을 반영한다.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이 참석한 전국의 대학총장들의 모임에서는 '자율'과 '책임'이 건배 구호였다.
하긴 딱 1년 전 이맘때 청와대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박형규 목사와 함세웅 신부 등 6월항쟁 당시 원로들을 초청해 가진 오찬 자리에서는 '위기다' '기회다'가 건배 구호였다. 6월항쟁 당시의 주도세력들이 지난해 초 느낀 위기감이 건배 구호 속에 그대로 담겨 있었던 셈이다.
지난 대선 과정에서도 이 대통령 당선인 진영 인사들은 어김없이 '이대로!'를 외쳤다. '이명박을 대통령으로!'라는 선거 구호를 줄인 말이지만 당시 50%대를 웃도는 압도적인 후보 지지율이 이어질 것을 기원하는 구호였다. 이대로 가면 대선 승리는 따 놓은 당상이니 조심하자는 자경(自警)의 의미까지 담았다.
대구에서는 김영삼 정부시절 '우리가' '남이가'라는 건배 구호가 '우리는' '남이다'로 바뀌어 유행한 적이 있었다. 김 전 대통령을 대구·경북지역에서 압도적으로 지지했지만 이른바 TK(대구·경북) 출신 인사들을 배제하고 PK(부산·경남) 출신 인사들만 중용하는 등의 정치적인 배신감을 맛봤기 때문이다.
김범일 대구시장은 요즘 '위하구'를 외치고 다닌다. '대구를 위하여'를 '위하구'로 줄인 것이다. 물론 김 시장 이전에도 대구에서는 '위하구'라는 건배 구호가 종종 쓰였다. 장세준 대구시장 비서실장은 "대구사회에서 공식석상에서 '위하구'를 상용한 것은 김 시장이 처음"이라며 "이는 대구 발전을 위하여라는 뜻이 담겨있다."고 설명했다.
김관용 경북도지사는 일자리 창출에 대한 의지를 담은 구호를 자주 쓴다. 김 지사가 '일자리를'이라고 선창하면 다른 사람들은 '맹글자'를 세 번 외치면서 화답한다. 지역사회의 두 기관장이 이처럼 건설적인 건배 구호를 제창하고 다니는 일은 박수를 받을 만하다. 이화언 대구은행장은 특별한 건배사를 준비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대구 출신의 강재섭 한나라당 대표는 모임마다 적합한 건배 구호를 쓰는 스타일이다. 그러나 모임의 성격에 관계없이 자주 쓰는 구호는 '9988 ·234'다. 99세까지 팔팔(88)하게 살다가 이틀(2)만 아프고 사흘째(3) 죽는다(4)는 뜻으로 나이가 들더라도 건강하고 활기차게 살자는 덕담(德談)인 셈이다. 강 대표의 한 측근은 "9988을 8899로 바꾸면 뜻이 달라진다."며 "88세까지 구구하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뜻"이라고 덧붙였다.
지난 2004년 한 지방의 시립합창단 상임지휘자가 술자리에서 노 대통령을 비하하는 뜻의 건배 구호를 한 사실이 인터넷에 알려지면서 자리를 물러난 일도 있었다. 다른 사람의 성공을 기원하는 덕담이어야 할 건배 구호를 한 번 잘못 외쳤다가 자신의 신세를 망친 셈이다. 노 대통령도 지난해 평양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 때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장수를 기원하는 건배사를 했다가 보수층의 거센 반발을 사기도 했다.
▶기업 건배문화도 다르다
우리나라 사람만큼 모임을 좋아하는 국민은 없다. 학연, 지연, 혈연 등 각종 인연을 통한 모임은 기본이고 요즘엔 인터넷동호회 활동을 통해 늘 다른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네트워크를 형성한다. 모임은 으레 음주가무를 동반한 회식으로 이어진다. 이럴 때 짧으면서도 의미 있는 건배 구호 한 마디로 분위기를 이끌 수 있다. 혹은 거창하고 장황한 건배사를 늘어놓다가 분위기를 싸늘하게 했다는 질책을 당할 수도 있다. 당신은 어떤 스타일인가.
기업회식 때도 다양한 건배 구호가 난무한다. 통신업계의 양대 축이라고 할 수 있는 SK텔레콤과 KT의 건배 구호는 대조적이다. SK텔레콤 직원들의 회식 때 건배 구호는 기업 문화를 그대로 반영한다. 건배 구호를 외치는 사람이 '내가'라고 외치면 다른 사람들은 '회사다.'라고 화답한다. 이어 '회사는' '우리다.'는 구호가 뒤따른다. 사람이 곧 기업(人乃社)이라는 SK텔레콤의 인재 중시 경영관이 반영된 결과다.
'황금알'을 낳는 이동통신 사업을 빼앗긴 KT직원들 사이에서는 한때 '011은' '우리 것'이라는 구호가 인기 있었다. 1, 2위를 다투는 상대업체에 대한 강한 경쟁심이 담겼다.
서명수기자 diderot@msnet.co.kr
♠ 알아두자! 재미있는 건배 구호
일반인들도 건배 구호 몇 가지 정도를 알아두면 회식 자리에서 적절하게 활용할 수 있다. 모임의 성격에 따라 재미있는 건배 구호는 회식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촉매제로 작용할 수 있다. '구구팔팔 이삼사'나 '나이야 가라'등이 중장년 모임에서 인기를 끄는 구호다. 나이에 상관없이 열심히 살자는 긍정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있어 누구나 부담 없이 쓸 수 있다. '카르페 디엠'(Carpe Diem: '현재를 즐기자'는 뜻의 라틴어)이나 '코이노니아'(Koinonia: '가진 것을 서로에게 아낌없이 나눠 주며 죽을 때까지 함께하는 관계'를 뜻하는 그리스어) 등의 외래어 건배 구호는 젊은 층이 선호한다.
▶개나리·진달래
이경숙 대통령직인수위원장이 신년 인사회에서 사용하면서 새삼 주목을 받고 있는 건배 구호다.
'개나리'는 '개인과 나라의 이익을 위하여'라는 뜻과 '계(개)급장 떼고 나이는 잊고 relax & refresh하자'는 두 가지 뜻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권위와 위엄을 벗고 위아래가 모두 하나가 되어 편하게 즐기며 기분을 전환하자는 의미다.
'진달래'는 '진하고 달콤한 내일을 위하여'라는 말을 줄인 것으로 미래에 대한 꿈과 희망을 강조하는 의미로 사랑받고 있다.
▶9988 234
한나라당 강재섭 대표가 애용하는 건배구호다. '99세까지 팔팔하게 살다가 이틀만 아프고 3일째 죽는다.'는 뜻으로 숫자를 적절하게 활용했다. 나이가 들더라도 건강하고 활력있게 살자는 덕담인 셈이다.
▶나이야 가라!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카피 문구처럼 '나이가 주는 한계를 뛰어넘어 새롭게 도전하는 것이 아름답다.'는 뜻을 담고 있다. 젊은 사람들의 모임보다는 중·장년 모임에서 쓰는 것이 적절하다.
▶당신 멋져!
'당신' '멋져'는 요즘 가까운 사람들 사이의 회식모임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건배 구호 중 하나다. '당신'은 '당당하게 살자. 신나게 살자.'는 뜻이고 '멋져'는 '멋있게 살자. 져주면서 살자.'의 첫글자를 땄다. '당당하게 신나게 살지만 이기려고만 하지 않고 가끔씩 져주면서 사는 당신이 정말 멋지다.'는 뜻이다.
이밖에 '나가자'(나라와 가정과 자신을 위하여), '당나귀'(당신과 나의 귀중한 만남을 위하여), 개나발(개인과 나라의 발전을 위하여), 초가집(초지일관 가자 집으로: 2차는 없다는 뜻) 등도 인기 있던 건배 구호로 기억되고 있다.
서명수기자 diderot@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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