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주말에세이] "예술, 그거 무슨 술 이름이냐"

아버지 10주기 기제에 참석하기 위해 상경하면서 한동안 아버지를 잊고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때는 아버지 없는 세상이 얼마나 추울지 상상하기도 어려웠지만, 지금은 까맣게 잊고도 살아가니 사람은 영악할 만치 적응력이 뛰어나다는 걸 새삼 알 것 같다.

아버지는 내가 글 쓰는 걸 좋아하지 않으셨다. 나는 특히 셋째 언니를 좋아했는데 재기발랄하던 그 언니는 고등학교 때 벌써 개인 시화전을 두 번이나 열고 박목월 선생께 등단 절차만 남겨 둔 상태였었다. 언니의 방에서 본 낯선 책들과 두툼한 원고지, 금장 뚜껑의 만년필은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서쪽 창으로 노을이 비치는 그 방에서 나는 언니의 푸른 꿈과 붉은 눈물을 동시에 보기도 했는데 묘하게 매력적이었다. 그런 언니가 병명도 확실치 않은 채 요절을 했다.

언니의 요절이 '그놈의 문학'에 있다고 믿으시는 아버지 곁에서 나는 발칙하게 시인이 되고 싶다는 꿈을 꾸었다. 글을 써서 받은 몇 개의 상장들을 아버지는 종이 쪼가리로 치부하셨지만 내 속에서 시라는 나무는 살금살금 뿌리를 뻗고 있었다. '아버지, 시는 언어가 만들어내는 가장 아름다운 예술이에요. 그리고 예술은 사람에게 보이지 않는 양식이고 힘이에요' 라는 어설픈 중얼거림을 아버지는 "예술, 그거 무슨 술 이름이냐?"라며 일축하셨다.

아버지의 관념 속에서 예술이란 다분히 비현실적이며, 가난하고 지난한 고통의 작업에서 나오는 결과물이란 것, 예술가는 헐벗고 피폐하기 이를 데 없는 삶을 산다는 인식이 팽배해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술에 대해서도 곧 주정과 흐트러짐과 올곧지 않은 행태를 가져오는 주범인 양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니 단박에 예술과 술을 결합하여 폄하하고자 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니 예술과 술을 결합한 그 기발한 어법이야말로 환유적 에스프리가 번뜩이는 구절이 아닌가 싶다. 예술과 술은 둘 다 동일한 음절 이외에도 사람을 취하게 하며 취한 만큼 고통을 주는 마력을 가진 게 아니던가.

사회·문화·경제적인 여러 변화를 거치면서 예술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많이 새로워졌으며, 예술가들 역시 현실과 이상을 현명하게 조화해 내기에 이르렀다. 그렇듯이 내 등단 무렵쯤에야 아버지의 생각도 훨씬 부드러워지신 듯, 등단 소식을 들고 아버지께 갔을 때, 아버지는 눈시울을 붉게 물들이면서 난생 처음 꼬옥 안아주셨다. "내 다 안다. 이제는 고통을 보석으로 만들어라." 딸자식이 그저 편하게 살길 바라신 마음 낸들 왜 모르랴. 시대는 변하고 사람의 생각도 변화한다. 고정불변하는 것은 세상에 아무 것도 없다.

'집집마다 그림 한 점 걸기'와 미술품 옥션이라는 행사들이 그림에 대한 친근한 정서를 말해주듯 근래 좋은 음악회에 가서 가족 단위로 감상하는 기회를 갖는 일을 보아도 예술이 일상화되어 감을 말해준다. 문학도 상당히 대중화되어 거리나 공원에서 시화전이 열리고 군데군데 시낭송회도 개최되며 공원이나 산책길에서 낯익은 시화와 시비를 만나는 일도 점점 보편화되고 있다. 그러한 행사가 꼭 긍정적인 측면만 갖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시나 예술이 우리의 삶에 가까이 자리 잡아 삶의 내용을 풍부하게 해주는 일임에는 분명하다.

이번 제사상에는 내가 아버지께 술 한 잔 올려야겠다. 예술가는 여전히 가난하지만 자신의 작업을 통해 삶의 진실을 발견해 가는 일이 가난을 상쇄하고도 남는다는 이야기며 주어진 삶에 예술만큼 명확한 인식을 주는 일도 드물다는 말씀을 다시 드려야겠다. 글 쓰고 난 이후의 내 삶을 글쓰기 전의 삶과 절대로 바꾸고 싶지 않다 말씀드리면 아버진 비로소 마음 놓으실까.

예술은 이제 눈에 번히 보이고 손 닿는 곳에서 우리의 삶에 자연스레 침투해 있다. 그리고 술의 문화도 과거의 부정적 이미지가 아닌 서로간의 소통과 화해의 매개체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예술과 술이란 어쩌면 오래도록 우리 삶의 곡진한 부분에 진득하게 관계해 온 요소가 아닐까. 그렇다면 아버지의 '예술, 그거 무슨 술 이름이냐'라는 말씀은 선견지명이 있으셨다 하리라. 예술처럼 우리의 일상을 어루만져주는 술, 술처럼 우리를 기분 좋게 취하도록 하는 예술, 아버지 말씀이 들리는 듯하다.

"술 한잔 하면서 우리 예술 할까?"

이규리(시인)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