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대구읍성 재조명

최근 대구읍성 영상재현 작업이 이루어졌다. 비록 어린이와 청소년 대상의 교육용 애니메이션 수준이나, 대구읍성에 대한 최초의 재현작업이라는 데 의의가 있다.

대구읍성은 조선 영조 13년(1737)에 축성되었으나, 1906,7년 철거된 이후 성터에 대한 내력이 당시의 자료와 구전으로만 전해 내려오고 있는 상태이다. 1888년 대구를 찾은 프랑스의 지리학자 샤를 바라의 기행문을 보면, 대구읍성은 한 폭의 그림처럼 단아하고 아름다우며 중국의 북경성처럼 위용이 대단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샤를 바라는 "둥근 길을 따라 쌓인 성벽이 북경성을 축소한 것과 같다. 성벽은 도시 전체를 감싸는 평행사변형이었고, 사방 성벽에는 웅장한 성문이 서 있었다. 성문의 정자에는 옛 역사를 나타내는 그림과 조각들이 가득했다. 나는 그곳에서 가을 햇볕아래 찬란한 색채를 빛내며 전원을 휘감아 흐르는 금호강의 낙조를 지켜보았다. 내 발 아래로 큰 도시의 길과 관사들이 펼쳐져 있었다. 서민들이 사는 구역에는 초가지붕이 이마를 맞대고 있고, 양반들이 사는 중심부에는 우아한 지붕의 집들이 늘어서 있었다."(샤를 바라, 성귀수 역, 조선기행, 2001, 눈빛)라고 묘사하고 있다.

오늘날의 동성로, 서성로, 남성로, 북성로는 대구읍성을 중심으로 지어진 이름이다. 읍성의 규모는 성벽 600~700m, 둘레 2,680~2,700m, 여장을 포함한 높이 4.5~5.6m, 폭 8m 내외로 추정된다. 성곽의 사방에 진동문, 달서문, 남문(영남제일관), 공북문이 있었고, 성벽의 동서에 한 개씩의 돌문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관찰사 감영이 지금의 경상감영공원 자리에 있었고, 업무를 보던 선화당과 징청각, 유치장, 객사와 육방관사, 대구부사가 중부경찰서와 종로초등학교 부근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점에서 대구읍성을 재조명하는 것은 바로 대구읍성이 문화 창조도시를 지향하는 대구의 전통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상징적 건축물이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대구를 영남의 전통적 중심도시라고 말하지만, 이를 뒷받침할 만한 흔적조차 제대로 남아있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대구읍성의 재현은 시민의 자긍심을 높이고, 외래 방문객들에게 대구의 참모습을 소개하는 계기가 될 수 있기에 중요하다.

우리는 지금 최근 20~30여 년간 문화자원을 고려하지 않은 채 전개되었던 대구의 도시개발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앞으로 다시 지금과 같은 후회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최근 의욕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대구 도심 재창조'의 밑그림을 그리면서 대구읍성 등과 같은 전통문화자원의 재현이나 다각적인 활용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서인원(대구경북연구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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