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이 싫다!
명절증후군은 며느리에게만 있는 게 아니다. 며느리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명절 공포가 시대가 바뀌면서 시부모 및 20, 30대로 옮아가고 있는 것. 이때문에 떨어져 있던 가족, 친지를 볼 수 있어 손꼽아 기다리던 명절이 '가장 피하고 싶은 날' '스트레스 받는 날'로 전락하는 경우도 있다. 명절 음식 준비, 비용 지출, 장거리 이동, 진학·취업·결혼 등의 부담, 형제, 친척간 비교 등은 정신적, 육체적인 스트레스를 높인다. 이 때문에 우울, 불안증세, 어지러움증, 두통, 소화불량, 복통 등을 호소하는 부모, 자식·며느리, 손자들이 적잖은 실정이다.
명절만 되면 정신과 상담 건수도 증가한다는 게 정신과 전문의들의 얘기다. 김성미 마음과마음정신과 원장은 "명절을 앞뒤로 진료를 받는 사람들이 평소보다 30, 40% 정도 많다."며 "명절이 다가오면 고부, 형제 및 며느리간 갈등을 미리 걱정해 상담하러 오는 사람들이 많은데 주로 극도의 긴장감과 떨림을 막기 위한 약 처방을 받아가곤 한다."고 했다. 김 원장은 "가족·친지를 만나 얘기하면 말문이 막히고 대인공포증 증세도 나타난다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우리나라 문화와 관련된 특별한 증상인 만큼 가족 스스로 해결해 나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특히 며느리보다 시어머니의 상담이 늘고 있는 추세다. 박용진 진스마음클리닉 원장은 "실제 명절이 지나면 고부간의 갈등 때문에 상담하는 경우가 며느리보다 시어머니가 더 많다."며 "부모의 경우 너무 옛날에 집착해 옛 것을 고집하지 말고, 새로운 사회 분위기를 받아들이려 노력해야 하고, 아들·며느리도 명절 등 행사 동참 못지 않게 부모에게 보다 성의를 보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최태진 최태진정신과 원장도 "시어머니의 경우 며느리의 일이나 태도 등으로 화가 나는데 화를 못내고 속앓이하기 일쑤여서 기가 죽거나 침체돼 우울해지는 경우가 많다."며 "여기에다 신체적 과로로 신체 저항력 떨어져 감기, 두통 등 증세를 보이기도 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명절 스트레스를 줄이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 전문가들은 새로운 가족 문화를 만들기 위한 가족 구성원들의 노력이 절대적이라고 충고한다. 명절만이라도 갈등의 불씨가 될만한 말은 되도록 피하고, 옛날 사진을 보며 좋았던 추억을 되살린다거나 텔레비전보다는 좋은 놀이를 준비, 함께 하며 명절을 즐길 필요가 있다는 것. '거부할 수 없다면 즐기고, 현실을 받아들이고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방법이 최선책'이라고 조언하고 있다. 박 원장은 "명절을 의무라고 느끼기보다는 그냥 오랜만에 모여 즐겁게 논다는 생각으로, 이벤트 분위기를 만들어 재밌게 시간을 보내는 방법을 찾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라며 "명절 때만이라도 취직, 결혼, 학업 등 당장 해결할 수 없는 일에 대한 언급은 피하고, 연대감을 찾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평소에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도 명절증후군을 피할 수있는 방법. 가족간의 평소 관계에 따라 일하는 게 즐거울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엔 쳐다만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나빠지고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는 것. 또 실제 명절 때 해야 하는 일보다 미리 걱정하는 것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것이 더 큰 만큼 너무 일찍부터 부담을 가지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다. 최 원장은 "하루 이틀 일 때문에 한 달 전부터 걱정하는 경우가 많은 만큼 불필요한 부담과 걱정을 줄일수록 명절증후군에서 해방될 수 있다."며 "한 사람이 스트레스를 받으면 본인뿐 아니라 모든 구성원들까지 힘들어지기 때문에 서로 조심하고, 되도록 마음을 열고 터놓고 지낸 것도 즐거운 명절을 보낼 수 있는 좋은 방법일 것"이라고 충고했다.
◆명절증후군 극복 어떻게
#결혼 5년차 최수진(32·여) 씨는 최근 시어머니에게 당돌한(?) 제안을 했다. '이번 설에 가까운 콘도에 가서 가족 단합대회를 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물은 것. 직장에 다니며 아이를 키우다 보니 음식 장만 등 집안 일에 익숙지 않아 명절마다 설거지를 전담했지만 이번 설엔 상황이 달라졌다. 손위·아래 동서 모두 임신을 한 탓에 설거지는 물론 음식 준비 등을 시어머니와 둘이서 해야 할 지경에 놓인 것. 최 씨는 "다가올 설만 생각하면 벌써 가슴이 답답하다."며 "임신한 형님과 동서가 일 하기를 바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일에 서툰 내가 다른 일까지 떠맡아 할 생각에 푸념삼아 어머니께 '그냥 놀러가자'고 말씀은 드렸지만 걱정과 한숨뿐"이라고 하소연했다.
#김지숙(62·여) 씨는 명절 때만 되면 화가 치민다. 며느리를 2명이나 봤지만 음식 등 명절 준비에 도움은커녕 오히려 울화통만 치미게 하는 것. 감독관이라도 된 듯 쳐다보거나 부엌만 어슬렁거리다 잠깐 거든다 싶더니 손자 챙긴다고 부엌을 나가기 일쑤여서 야단치지도 못하고 속앓이만 한다. 예전처럼 음식을 많이 하지도 않는데 그저 편하려고만 하고, 그렇다고 고분고분한 것도 아니어서 명절만 되면 오히려 스트레스를 더 받는다는 것. 김 씨는 "며느리를 보면 명절이나 집안 행사에 좀 편해지지 않을까, 음식 준비 등에서 다소나마 해방되지 않을까 은근히 기대했는데 오히려 숟가락 수만 더 늘어 일만 증가했다."며 "며느리 땐 시어머니가 손하나 까딱하지 않아도 당연하다 생각하고 일했고, 이젠 며느리를 시어머니처럼 받들고 살아야 하는 불쌍한 신세가 됐다."고 한탄했다.
#이진한(35) 씨는 설만 생각하면 벌써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다. 공무원 시험에 매달린지 7년. 그러나 여전히 수험생 신분이다. 직장을 구하지 못하다 보니 결혼도 못했다. 취직, 결혼 말만 나와도 노이로제가 걸릴 정도다. 이번 설 명절 때도 그냥 눈 질끈 감고 '꾹' 참고 듣고 넘겨야 한다. 가만히 둬도 미칠 지경인데 '인사 반 걱정 반'으로 던지는 집안 어른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가슴을 후벼판다. 가시방석이다. 이 씨는 "제사만 참석하고 식사한 뒤 덕담을 나누는 시간이 되면 슬그머니 자리를 뜬다."며 "또래 형제, 사촌 등에게 '너는 어디 다니냐' '결혼은?'하며 해마다 똑같은 질문을 해대는 통에 비교도 되고, 할 말도 없고 해서 얼마 전부턴 참석도 하지 않고, 집안 어른들 댁에 인사도 다니지 않는다."고 한숨지었다.
이호준기자 hoper@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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