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특별 인터뷰]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

▲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은
▲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은 "포스코는 제철보국을 실현한 세계 일류기업으로 충분한 자부심을 가질만한 기업"이라고 말했다.

박태준(81·TJ). 그의 이름 석자는 많은 한국인들에게 '투지', '도전', '불굴', '성취' 같은 활기를 불어넣는 대명사로 다가온다. 제철소 건설에 실패하면 모두 영일만 앞바다에 빠져 죽자는 이른바 '우향후' 정신으로 무장해 포스코를 세계 최고·최강의 철강업체로 만들었다. 국무총리를 지냈지만 '회장님'이라는 직함을 더 좋아하는 TJ에게 포스코는 분신이다. 그래서 창립 40주년은 그에게 더욱 각별하게 다가온다고 했다.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한파(寒波)를 온몸으로 정면 돌파하던 시절은 갔고…(웃음). 한파를 피해 일본 남쪽지방으로 나가 있기도 했는데, 지인들 만나는 것이 중요한 일과요.(현재 박 명예회장은 기장군 임랑면 고향집에 머물고 있다.)

▶후쿠다 현 일본수상과 각별한 관계라고 들었습니다만.

=그 분의 선친이 후쿠다 다케오 전 수상이신데, 아버지와의 두터운 인연이 자연스레 아들과의 깊은 인연으로 이어졌지요. 고인(후쿠다 다케오)은 한일국교정상화 당시(1965년) 대장상을 지냈고 1978년에 수상이 되셨는데, 한·일 관계나 포스코 프로젝트에 일본의 협력과 지원을 이끌어낼 때 중요한 역할을 해주셨지요. 특히 포스코에는 잊을 수 없는 은인들 중의 한 분이지요. 1979년 여름이었나, 한·일 정상회담을 위해 방한한 후쿠다 수상이 박정희 대통령께 특별히 부탁해서 예정에 없었던 포항까지 날아오신 일이 있었습니다. 나는 현장을 돌고 있다가 작업복 차림으로 포항 비행장에 영접을 나가야 했지요. 그만큼 나에게는 각별한 신뢰와 애정을 보내주셨던 분입니다.

▶지난 여름에 포항 파이넥스공장을 둘러보셨는데, 소감이 궁금합니다.

=1992년이었나, 내가 오스트리아 '푀스트-알피네'에 들렀다가 제선(쇳물생산) 공정에서 혁신을 일으킬 것이라는 시험단계 공법을 보고는, 우리도 들여와서 연구를 하라고 지시했는데, 15년에 걸친 포스코 특유의 도전정신으로 마침내 상용화에 성공한 것입니다. 후배들이 이룩한 자랑스럽고 감격적인 쾌거입니다. 물론 아직은 갈 길이 멉니다. 조업 데이터는 포스코의 것이고 기본 엔지니어링은 푀스트의 것이니까 이 문제도 극복해야 되고, 공장을 더 단순화해야 하는 것도 대표적인 과제요. 그러나 인재들을 잘 관리해 나간다면 결국은 시간문제지요.

▶포스코 경영을 통해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무엇입니까?

=장장 25년이니까 1년에 하나씩 해도 25가지나 되지 않겠소?(웃음) 그런데 시작과 끝을 중요하게 본다면, 하와이 구상과 박정희 대통령께 보고한 일이 얼른 떠오르는군요. 1969년 2월 KISA(대한국제제철차관단)가 포스코를 팽개치니까 별안간 우리는 '1억 달러'를 빌릴 길이 없어졌던 것인데, 하와이에서 '대일청구권 자금의 일부를 전용하자.'는 생각이 번개처럼 내 머리를 쳤고, 그게 포스코를 되살리는 불씨였지. 그로부터 25년 지나 광양에서 2천100만 톤 체제를 완성한 직후, 1992년 10월 3일, 개천절에 박 대통령 묘소로 찾아가서 각하께서 저에게 부과하신 임무를 성공리에 완수했다는 보고를 올리고는 포스코 회장에서 물러났지요. 가슴에 눈물이 가득했지만 몇 줄기만 흘렸소.

▶1973년 6월 9일 오전 7시 30분, 첫 출선 당시의 소감을 듣고 싶습니다.

=쿵, 쿵, 쿵, 가슴이 뛰는 중에 굉음과 함께 황금색 벌건 쇳물이 쏟아졌지요. 고로 주상에서 지켜보고 있던 모두가 순식간에 만세를 불렀는데, 내 눈에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맺혀 있었어. 잠시 뒤에는 '아!, 우향우 하지 않아도 되는구나. 그러나 드디어 기나긴 역정의 시작이구나.' 이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고…('우향우'란 실패할 경우에는 영일만 바다에 투신하겠다는 포스코의 정신이다)

▶요즘 원자재 폭등세 속에서 포스코의 '자원은 유한, 창의는 무한'이라는 슬로건이 다시 화제가 되고 있는데, 태동 배경을 말씀해 주십시오.

=포스코는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고 합니다. 무가 뭐냐? 일관제철소를 처음 건설할 때는 자금, 기술, 경험을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창업 당시 우리에게는 자금도 기술도 경험도 없었습니다. 자금은 KISA가 배반하자 연기처럼 사라졌고, 용광로를 제대로 본 사람은 나 혼자였으니 기술과 경험이 있을 리 만무했지요. 설상가상 우리나라는 제철 원료도 없었습니다. 이러한 전무(全無)의 조건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해답은 사람의 창의뿐이지. '창의'에는 당연히 기술개발이 포함되지만, 업무개선이나 원가절감 같은 좋은 아이디어들, 제철보국의 사명감 같은 정신적인 요소도 다 포함되는 거요.

▶40년 전과 비교할 때 시대적, 사회적, 경제적 상황이 크게 다른 지금, 포스코가 가장 신경 써야 할 부분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해외진출이 늦어졌다는 겁니다. 중국에서 일관제철소 기회를 놓쳤고, 인도와 베트남으로 나가 있지요. 베트남은 속도가 붙었고, 인도는 지지부진한데, 글로벌 시대에 세계 일류기업으로서 진정한 리더가 되자면 해외 거대 프로젝트를 성공리에 완수해야지요. 물론 M&A도 경계해야 되고.

▶일부에서는 포스코가 '제철보국'의 취지를 너무 빨리 떨쳐버리고 자사이익만 추구한다고 지적합니다만.

=제철보국에도 단계가 있어. 근대화시대에는 국가기간산업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자사이익을 양보하면서 조선, 자동차, 가전제품을 비롯한 연관산업의 성장에 크게 기여했으니, 첫 단계 임무를 충실히 완수한 거지요. 다음 단계는 글로벌 무대인데, 여기서 제철보국은 치열한 국제경쟁을 이겨내고 세계 일류기업으로서 국가경제의 기둥이 되는 거요.

▶ '국민기업 포스코'의 이미지가 빠른 속도로 퇴색하고 있다는 비판론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포스코 40년 역사에서 '국민기업 포스코'의 이미지에 엄청난 타격을 입힌 사건은 스톡옵션 도입이었소. 지금은 폐기됐지만, 스톡옵션은 제철보국의 창업정신을 배반하고 거기에 정면으로 도전한 사건이기도 했어요. 만약 포스코에 아직도 스톡옵션 도입이 정당했다고 주장하는 임원이 있다면 당장 자기 발로 사라져야 해. 그런 사람이 내 눈에 띈다면, 가만두지 않겠소. 창업자에게 그만한 권리와 책무는 있는 것이오. 또 앞으로도 묵과할 수 없는 일이 발생할 경우에는 결코 침묵하지 않을 작정이오. 이것은 포스코와 국가경제를 위해 창업자로서 해야 할 기본적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새 정부가 '친기업, 비즈니스 프랜들리'를 표방하고 있습니다. 포스코에는 어떤 지원책이 필요할까요?

=새 정부는 특히 포스텍 중심의 새로운 프로젝트를 적극 지원해주기 바랍니다. 포항방사광가속기를 제4세대 가속기로 업그레이드 하는 일이 급하고, 암연구센터를 비롯한 첨단산업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여줄 것으로 기대합니다.

▶포스코 창립 4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포항에는 제철소 앞길을 '포스코路', 5호광장을 '청암광장'(청암은 TJ의 아호다)으로 개칭하자는 논의가 있습니다. 어떻게 받아들이십니까?

=그런 일이야 내가 뭐라 할 수 없지요. 포항시와 포스코가 잘 협력해서 항상 윈-윈의 길로 가고 있다면 만족합니다.

▶창립 40주년을 맞는 포스코맨, 그리고 포항시민과 대구 경북 지역민들에게 새해 덕담을 부탁드립니다.

=포스코맨은 제철보국을 실현한 세계 일류기업이라는 자부심을 간직하고 지역사회의 일원으로서도 책임을 다해주기 바라며, 포항시민은 한국제철산업의 고향인 포항에서 포항 출신의 대통령까지 배출했으니 어느 때보다 자신감이 충만할 텐데, 대구 경북이 다함께 심기일전해서 좋은 환경을 바르게 활용할 합리적인 방법론을 치밀하게 강구하기 바랍니다.

부산 기장군 박 명예회장 자택에서·박정출기자 jcpark@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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