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설, 그땐 그랬지…갈 길 멀어도 마음은 설레었네

▲고향 가는길(사진 위). 창문 틈새로 고향 가는 귀성열차에 몸을 싣던 1970년대(사진 아래).
▲고향 가는길(사진 위). 창문 틈새로 고향 가는 귀성열차에 몸을 싣던 1970년대(사진 아래).

그 땐 왜 그렇게 추웠는지 모를 일이다. 지구 온난화가 어떻고, 한반도가 아열대기후로 바뀌니 마느니 해도 불과 20,30년 사이에 이렇게 겨울 날씨가 바뀔 줄이야. 자동차도 흔치 않던 그 시절, 고향 가는 길은 멀기도 멀었다. 서울에서 대구로 내려오는 것만이 귀성전쟁은 아니었다.

시외버스 정류장 앞 상가에는 차례상에 올릴 청주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고, 과자와 사탕'초콜릿이 잔뜩 들어있는 종합선물세트, 사과와 배로 장식된 과일 바구니가 가게 진열장에서 얼른 제 주인 만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춥기도 추웠고, 멀기도 멀었으며, 어렵기도 어려웠던 그 시절. 하지만 정이 있었고, 여유가 있었고, 설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설렘이 있었다.

◇설날을 되찾기 까지

올해 설 연휴는 3일이다. 토요 휴무일까지 포함하면 연이어 5일 쉴 수 있다. 하지만 설날이 그 이름을 되찾고, 휴일로 정해지기까지는 우여곡절도 많았다.

지금부터 33년 전인 1975년 10월 26일자 일간지 한 귀퉁이를 보면 '구정(舊正)을 공휴일 검토'라는 제목의 기사가 올라와 있다. 정부가 당시 법정공휴일이던 'UN의 날'을 휴일에서 빼고 구정을 '농민의 날'로 정해 쉬도록 하는 방안을 검토 중인 가운데 당시 야당이던 신민당은 구정을 '조상의 날'로 정해 쉬도록 해야 한다고 정부를 압박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중과세 금지, 즉 설을 두번 쇨 수 없다는 정부의 방침에 밀려 번번히 논의로만 끝났다. 우리나라가 신정, 즉 양력 1월 1일을 설로 정한 것은 1896년(고종 3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러시아 공사 베베르와 개화파의 의견을 받아들여 '을미개혁'을 단행하면서 신정을 채택한 것. 이후 일제식민 치하에서도 '일본 설'이라는 비난을 받아가면서도 신정은 이어져왔다. 그렇다 해도 수 천년을 면면히 이어온 민족의 풍속을 바꿀 수는 없었다. 1978년 2월 일간지에 실린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사실상 국민의 70~80%가 구정을 쇠는 것으로 나타났다.

경찰 공무원인 김모(56) 씨는 "아무리 정부에서 강요해도 농촌에서는 거의 모든 집이 구정을 지냈다."며 "형제들이 설날마다 큰집에 모여서 차례를 지내고 오랜 만에 덕담도 나눴지만 직업상 한 번도 가지 못해 안타까웠던 기억이 난다."고 했다.

1980년 2월 16일자 '매일신문'에는 '출근 강요된 구정, 되레 절약 무드 깨'라는 기사가 있다. 구정에도 관공서 문을 열기는 했지만 민원인 한 명도 없이 난방용 기름만 낭비하고 있다는 내용. 당시엔 구정이 되면 동성로 상가들은 일제히 문을 닫고, 거리에도 오가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이 처럼 정부와 국민이 따로 지내는 설이 몇 해 계속되던 중 민정당 정권이 들어서면서 다시 구정 공휴일 논란이 재연됐고, 급기야 1984년 12월 민정당 차원에서 이듬해부터 '조상의 날'로 지정해 하루 쉬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명칭에 대한 반대 여론이 들끓었고, 1985년부터 '민속의 날'이라는 이름으로 구정이 다시 우리들의 품으로 돌아왔다. 구정이 고유의 제 이름인 '설'을 되찾기까지는 다시 4년이 흘러야 했다. 1989년부터 설이라는 이름과 함께 사흘간의 연휴가 보장됐다.

◇사라져가는 설 풍속도

설하면 떠오르는 세시풍속으로 윷놀이'제기차기'널뛰기'연날리기 등이 있다. 차례를 지내고 떡국으로 점심을 먹고난 뒤 곱게 한복을 차려입고 집 안마당에서 얼추 스무 명은 넘음직한 집안 식구들이 둘러서서 윷놀이를 한 추억이 있다. 아이들은 저마다 어른들이 만들어준 연을 들고 나와 겨울 찬바람이 쌩쌩 몰아치는 들판 한가운데서 추운줄도 모르고 하늘 높이 솟아오르는 연을 바라보며 탄성을 지르곤 했다. 담벼락 아래 겨울햇살 한 줌 찾아드는 곳에 아이들이 둘러서서 제기차는 풍경도 낯설지 않았다.

김현욱(68) 씨는 "자가용도 흔치 않던 시절, 설을 쇠러 가려면 한나절이 꼬박 걸리곤 했다."며 "설날 새벽 동도 트기 전에 가족들끼리 세배를 나눈 뒤 떡국으로 아침을 먹고는 버스를 타고 시외버스정류장까지 가서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서야 큰 집에 갈 수 있었다."고 했다. 지금은 고속도로가 뻥뻥 뚫려서 1, 2시간이면 충분하지만 마음의 거리는 더욱 멀게만 느껴진다고.

그렇게 찾아간 큰집에서 차례를 지내고 난 뒤 마냥 놀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대부분 농촌은 집성촌인지라 가까운 일가친척을 찾아 세배를 드리는 것도 큰 일 중에 하나. 그 때만 해도 정이 넘쳤다. 가는 집집마다 강정과 차례 음식을 내놓으며 조금이라도 더 먹으라고 강권(?)했고, 행여 음식이 입에 안맞아 적게 먹는다고 서운해할까봐 억지로라도 한 두점씩 더 먹다보면 과식하게 마련이었다.

직장인 최욱환(34) 씨는 "아직 시골에 어른들도 계시고 일가친척들도 모이기 때문에 설마다 내려가기는 하지만 예전처럼 이틀씩 묵지는 못한다."며 "세태가 바뀌다보니 설날 점심을 먹고나면 곧장 처가집으로 찾아가 세배를 드려야 한다."고 했다.

이제는 이름만 남아있는 설 풍속도 많다. '청참'은 설 새벽에 일정한 방향없이 돌아다니다가 처음 듣는 짐승의 소리로 한 해 운수를 점치는 것을 뜻한다. 까치 소리를 들으면 풍년과 행운을, 다른 새소리를 들으면 흉년과 불행의 징조로 여겼다. '세화', 즉 새해 그림을 나누는 집들도 있었다. 옛날 양반사회의 풍습을 본 딴 것으로, 닭과 호랑이 그림을 그려 선물하기도 했다.

닭과 호랑이는 길조를 뜻하는 동물이어서 액운을 물리친다고 믿었다. '야광귀'도 있었다. 설날 밤 하늘에 있는 야광귀라는 귀신이 내려와 인간 세상에 돌아다니다가 자기 발에 맞는 신발을 찾으면 신고 가버린다고. 이 때 신발을 도둑맞은 사람은 한 해동안 재수가 없다고 여겼고, 따라서 신발을 방안에 넣어두거나 일찌감치 대문을 걸어잠그기도 했다.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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