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제사 접빈객(奉祭祀 接賓客). 제사를 받들고 집안을 찾는 손님을 맞이하는 일은 종갓집의 안주인인 종부의 가장 막중한 임무다. 내로라하는 종가집이 많은 안동의 경우 4대 봉제사와 불천위 등을 합치면 웬만한 직계와 방계 종가의 1년 제사 횟수는 10여 회를 훌쩍 넘기기 일쑤다.
여기에 한가위 차례와 설 제사까지 합치면 대개 쉬는 달이 없을 정도이며 제수를 장만하고 제상을 차리는 일도 하루 이틀로는 어림없다. 이 모두가 가가례(家家禮)를 따라 종부의 지휘아래 차려진다. 불천위 제례에서 빠지지 않는 안동 권씨 종가의 오색강정은 여럿 사람이 한 손처럼 움직이지 않으면 만들어 낼 수 없다.
가장 오래된 요리책인'수운잡방'을 펴낸 광산 김씨 종가는 쇠족을 푹 고아 굳힌 족편을 올리는데 안동지역 겨울철 별미로도 통하는 명품음식이다. '음식디미방'의 저자인 정부인 장씨의 시댁인 재령 이씨 종가의 더덕 섭산삼은 두들긴 더덕에 찹쌀가루를 묻혀 튀겨낸 음식으로 그 맛과 영양이 산삼에 뒤지지 않는다.
안동 장씨 칠계재(七戒齋) 종가의 식해는 엿기름에 밥을 삭혀 조기 등 고급 해물과 버무린 숙성음식으로 곰삭은 맛이 일품이며 강정과 약과, 다식 또한 고급스럽다. 종가의 종부는 이렇듯 한 번 설을 쇠려면 제례음식 준비에만 최소한 보름 전에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대신 그 만큼 누대를 거쳐 이어온 종가의 제례 내림음식에는 종부의 손맛과 정성이 서려 더욱 기품이 있다.
종가의 설 제례풍속을 스케치하러 나선 안동 서후면 금계리의 칠계재(七戒齋) 종택. 뚝 떨어진 수은주 탓에 며칠 전 내린 잔설이 발아래서 곱게 바스락거리며 살얼음 부서지는 소리를 내는 사랑채 앞마당에서 칠계재의 7대 종부로서 37년 째 종가의 안주인을 맡고 있는 류춘영(60) 씨를 만났다. 류씨는 때마침 제례음식인 강정을 만들고 있었다.
종부다운 후덕함이 묻어나는 얼굴로 혼자 강정을 만드는 방에 안내를 받아 그의 솜씨를 보면서 설 제례음식 장만에 대한 이런 저런 추억담을 들어봤다.
◇"우리 전통음식은 샘이 만심데이"
"예전에는 아궁이 불이 불편하고 불조절도 안돼 일부러 종택 마당에 짚불을 붙여 강정이나 약과, 다식을 만들었심데이. 지금은 이동식 가스 불판을 이용하니 그나마 혼자서도 강정을 만들 수 있지예." 튀긴 쌀과 수수, 흰 깨와 검은 깨가 담긴 광주리가 널린 방 한 가운데 류 씨는 수수를 한 움큼씩 조리에 담아 끓는 기름에 튀겨냈다. 붉은 빛이 은은한 수수는 기름 속에서 조금만 지체하거나 빨리 건져내도 제 빛을 잃어버린다. 이 때문에 류씨는"전통음식은 샘이 많다."고 표현했다.
강정은 재료준비에서 완성까지 최소 5~7일이 걸린다. 곡물을 엄선, 손질하는 일부터 튀긴 후 엿물과 버무려 얇게 편 다음 모양을 내기까지 많은 정성이 든다.
쌀강정만 해도 약간 질게 한 밥알을 찬 물에 세 번 헹군 다음, 면 보자기에 싸서 사흘동안 말려야 기름에 튀겨낼 수가 있다. 그렇게 하면 시중의 뻥튀기 쌀강정과는 달리 노르스름한 색의 고급스런 쌀강정이 완성되기 때문이다. 맛 또한 바삭거리는 식감과 함께 고소함이 입안 가득 퍼진다.
엿과 섞은 흰깨를 얇게 펴 네모꼴 판형을 만든 다음 흰깨의 절반 크기로 다시 검은깨로 판형을 만들어 두 판형을 겹쳐 김밥 말 듯 말아 일정기간 굳힌 후 썰어내자 태극문양이 곱게 그려진 강정이 만들어 지기도 했다. 검은깨와 땅콩을 섞어 강정을 만들자 이번엔 강정 속에서 한 떨기 매화꽃이 피어난다.
"강정은 절대 서두르면 안돼요. 정성을 다하지 않으면 맛과 모양이 엉켜 엉망이 되기 십상입니데이." 지켜보니 그러했다. 말린 수수를 끓는 기름에 넣자 뜨거운 기름이 뽀글거리며 수수 알 사이로 솟아오를 즈음 조리를 탁 털며 건져내자 붉은 제 빛을 잃지않은 채 바삭한 수수튀김이 완성된다.
종부는 평소 준비해둔 대추와 귤껍질도 잘게 썰어 쌀이나 수수와 섞여 강정을 만들어내는데 그 모양새와 새콤달콤한 맛이 일품이다.
◇"시집와 20년 되니 일이 손에 익데요"
전주 류씨 집안이 친정인 류씨는 처녀 때부터 나름의 눈썰미와 음식과 요리에 대한 취미도 있어 종부로서 기본 소양을 갖춘 셈이었다. 하지만 가가례의 관습과 낯선 환경에서 제례를 치러나가기엔 부족함이 없지 않았다. "매사 서툰 내게 시어머니는 딸처럼 자상하게 가르쳐 줬심데이. 보통 설 보름 전에 강정, 유과, 다식 등 기초적인 전통음식들을 장만하는데 조금 어설프게 모양이 나오고 제 맛을 내지 못해도 늘 감싸주었던 분이 그 분 아입니꺼."
류씨의 솜씨가 호된(?) 시집살이에서 얻은 성과라는 말이다. 큰집 살림이 무릇 그러하듯 한 해 두 해만에 종가의 전통 내림음식을 모두 소화해 내기엔 무리였던 것이다. 그 와중에 류씨의 마음고생은 딴 데 있었다. 명색이 종가 맏며느리로 시집와서 내리 딸만 셋을 낳았기 때문이다. 이어 넷째를 임신했을 때는 심각한 우울증을 앓으며, 중절수술을 생각하기도 했다.
자칫 종가의 문이 닫힐 위기상황이었던 셈. "그 때 시어머님께서 '조상님이 주신 자식을 그렇게 버릴 순 없다'며 완강히 말리셨지요." 그 결과, 마침내 아들을 얻었고 면목도 서게 됐다.
이렇게 세월이 흘러 한 20년이 지나자 혼자서 제례음식을 장만해도 음식에 깃든 정성과 맛, 모양과 오색의 조화에 있어 모자람이 없게 되더라는 게 류씨의 귀띔이다. 이 후 처녀 때 취미를 살려 전통음식에 관심을 더욱 갖게 되면서 궁중요리 전문가였던 황혜성(작고) 씨 문하에서 배우기도 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는 가운데서도 류씨의 손은 잠시도 멈추질 않는다. 눈대중으로 버무린 튀김수수와 검은 깨 등을 묵직한 대형 나무도마위에 깐 비닐에 붓고 사각모양으로 접은 후 홍두깨로 쓱싹쓱싹 밀자 얇은 강정 판이 만들어지고 이어 완전히 굳기 전에 형태를 잡더니 자로 잰 듯, 한 입에 먹기 좋게 썰었다.
"보시다시피 강정은 형태를 잡는 섬세한 손길, 적당한 손목의 힘이 들어야 보기도 좋고 맛도 좋지예." 맛보라면 건넨 강정이 정말 맛이 있다. 그게 류씨의 보람이다. 초등학교 다니는 외손녀도 외갓집에 올 때마다 이'할머니 과자'만 찾는다고.
요즘 그는 한 가지 소망뿐이다. 그의 솜씨를 물려줄 참한 며느리를 맞는 것. "종가집이라 해도 다른 일은 내가 하고 이 전통 내림음식 만드는 법을 물려주려 해도 선 듯 시집 올려는 처자가 없네요."
현재 류씨는 안동지역 51명의 각 문중 며느리들로 구성된 '우리음식연구회'회원으로서 전통음식을 개발해 일반인들에게 선을 보이는 활동을 하며 10년 전부터는 강정을 비롯해 제례음식, 폐백, 이바지 음식을 맞춤형으로 소량 주문생산하고 있다.(054-855-5146) 내년 이맘때 쯤 고운 한복을 입고 며느리와 함께 설 제례 음식을 준비하고 있는 종부 류춘영 씨를 기대해 본다.
우문기기자 pody2@msnet.co.kr
사진·정재호 편집위원 newj@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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