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엽기 발랄 그녀, 솔직 엉뚱함으로 사랑받다

4차원 시대, 왜?

내 별명은 '4차원 소녀'다. 언젠가부터 그렇게 바뀌었다. 난 그냥 내가 느낀대로 말하고, 하고싶은대로 행동했을 뿐인데 사람들은 이런 내 모습이 황당하고 엉뚱하단다. 예쁜 꽃을 보면 괜시리 기분이 좋아 머리에 꽂고 셀카 한 방 찍어주고, 기분이 좋을 땐 흥얼흥얼 노래도 곧잘 부른다. 요즘 한창 심취하고 있는 과제는 '화성에 생명체가 살까?'. 고민거리가 뭐냐고 물으면 "환경파괴로 인한 지구의 미래가 제일 걱정"이라고 서슴없이 대답한다. 이런 내가 뭐가 이상한가? 하지만 사람들은 날 '독특한 정신세계를 가진 인간'으로 분류해 버리고 말았다.

이런 내 '행태'에 대한 별명도 시대에 따라 변화했다. 영화 '엽기적인 그녀'가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을 때는 '엽기녀'라 불렸다. 영화 '웰컴투 동막골'의 여일이가 사람들의 관심을 독차지 했을 때는 당연히 '동막골' 혹은 '여일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지금은 '4차원 소녀'다. 이건 언제, 어디에 기원을 두고 만들어진 말인지 알 수가 없다. 언론에서 엉뚱한 매력을 가진 여자 연예인들을 '4차원 소녀'라고 부르기 시작하면서 내 별명도 언제부턴가 '4차원'으로 굳어져갔다. 예전의 별명들보다는 그나마 고상해진 것 같아 좋지만, 내 정신이 어딜봐서 4차원이란 말인가? 스스로도 의문이다.

▷ 내멋에 살아, 4차원 연예인들!

연예인 중 최고의 '4차원'으로 손꼽히는 그룹 슈퍼주니어의 김희철. 그는 내뱉는 말마다 화제를 만들어낸다. 한 토크쇼에서 여자친구보다 더 예쁜 자신의 외모 때문에 사귄지 2주 만에 헤어졌다는 이야기를 털어놓으면서 "솔직히 이렇게 생긴 것이 내 잘못은 아니지 않느냐."고 푸념하는 인간형이다. 팬들을 향해 '닥숭(닥치고 숭배)'을 외치는 그는, 자신을 '신데렐라'라고 부르며, 성별은 '미소년'이라고 표기하는 엽기적인 짓도 서슴지 않는다.

골수이식으로 화제를 모았던 탤런트 최강희 씨 역시 '4차원 소녀'의 대표주자다. 자신의 미니홈피에 "우주 고아가 된 듯한 자유롭고 엉뚱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는 설명과 함께 멍한 표정과 엉뚱한 콘셉트의 사진을 올려 놓는 배우다.

탤런트 서우는 엽기적인 춤사위로 일약 '스타'의 반열에 올랐다. 모 빙과류 CF에서 무표정하면서 맹한 표정으로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손바닥을 치는 동작을 선보여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 이런 모습은 서우가 평소 시트콤 '김치치즈 스마일'에서 보인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요거트를 밥에 부어 먹거나 콜라에 밥을 말아먹으면서 동그랗고 큰 눈을 천천히 깜박이며 뭐가 이상하냐는 듯 외려 반문하는 표정이 압권인 그녀다.

예전 같으면 "쟤 왜저래?", "밥맛이야~" 소리를 들었을 법한 이런 연예인들의 기괴한 행동. 하지만 요즘은 오히려 팬들의 열화와 같은 사랑을 이끌어내는 촉매제로 작동하고 있다. 왜 일까?

▷당신은 정녕 외계인?

평범함과는 거리가 멀 것만 같은 사람들. 먼 우주에서 지구별로 날아든 것처럼 관행이나 사회적인 개념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만의 세계를 당당히 펼쳐보이는 것이 '4차원'의 매력 포인트다. 이런 '4차원 정신세계'의 독특함은 예전 같으면 '개념없는 인간'쯤으로 표현됐겠지만 요즘은 상황이 달라졌다. '무개념'이라는 말은 상당히 부정적인 의미를 내포하면서 이들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데 비해 '4차원'이라는 말은 '개성'이라는 말로도 다 담아낼 수 없는 독특한 그들만의 스타일을 존중한다는 느낌을 준다.

연예인들이 소위 '깬다'고 표현할법한 이런 자신의 적나라한 모습을 대중들 앞에 아랑곳없이 표출할 수 있게 된 것은 사회적변화 덕분이 아닌가 싶다. 포장된 이미지 속에 갇혀 있을 것만 같은 가식적인 모습보다는 순수한 인간적인 모습 쪽으로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기 때문이다. 소위 '깬다'고 말을 할 수밖에 없는 그들의 행동을 통해 연예인 속에 잠재한 또 하나의 '인간'을 보는 것이다. 또 하나의 요인은 튀어야 살아남을 수 있는 연예계의 특성 때문. 그래서 토크쇼 등에서 일부러 돌출 발언을 일삼는 연예인들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김도영(36) 씨는 "머릿속에 뭐가 들었을까 궁금하다는 생각은 하지만 거부감이 들기보다 엉뚱발랄한 모습에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다."며 "어린시절 친구들 중에도 '괴짜'라고 불리는 '왕따'에 가까운 친구들이 한 둘 쯤은 있었지만, 요즘 이런 캐릭터들이 인기를 얻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시대변화에 따라 사람의 사고방식도 정말 많이 변하는 같다는 생각을 한다."고 했다.

최근에는 UCC(손수제작물) 바람을 타고, 일반인들의 엽기발랄한 행동들 마저도 선풍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추세. 자신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당당하게 공개하면서 타인의 입담에 오르내리는 것을 즐기는 세태다.

▷개성도 진화한다

우리 사회가 '일탈과 파격'에 열광하기 시작했던 것은 '엽기'라는 단어가 우리 사회에 등장하면서부터 였다. 1990년대 후반 인터넷이 사회 전반에 급속도로 퍼져나가면서 '황당하다, 심하다, 썰렁하다, 엉뚱하다' 등의 감정 표현들을 하나로 뭉뚱그린 '엽기'라는 문화코드가 생성됐던 것. 엽기토끼 '마시마로' 인형에서부터 싸이, 자두로 대표되는 독특한 캐릭터의 가수들이 등장하는 등 일상적인 것이라 간주되는 정서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대거 시작됐다.

그리고 지금은 '4차원' 시대. '엽기'라는 조금은 부정적인 단어로 시작됐던 억압된 본능의 표출이 '4차원'이라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진화한 것. 그러는 사이 '개성'도 진화했다. 그로테스크함과 기괴함은 벗어던지고 유쾌, 발랄함으로 재무장한 것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남다른 사고방식을 지녔다는 것은 환영받지 못할 일이었지만 요즘은 '뭔가 창조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 미화돼 보이기도 한다.

이런 변화에 대해 최태진 신경정신과 원장은 "근래 10여 년 간의 정치문화의 변화와도 관련이 있다고 보여진다."며 "관행이나 관습, 도덕 등 사회적인 개념에 순응하는 인간을 강요하는 정치문화 속에서 억압됐든 소수자·약자들의 욕구가 뿜어져나오면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견해를 내놨다. 하지만 아직까지 이들은 여전히 소수일 뿐이다. 최 원장은 "현재는 비주류적인 것들이 과장 표현되어지는 시대에 살고 있다."며 "어느 시대에나 온갖 형태의 '소수'들이 있어왔지만 표현수단이 부족했고 대중에게 전달될 방법이 없었는데 미디어 발달로 누구나 대중적인 접근이 가능해지면서 큰 변화를 불러 일으킨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한윤조기자 cgdream@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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