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사, 의사, 한의사 자격증은 이른바 '의학3시(試)'로 통한다. 하나의 자격증도 따기 어려운데 세 가지 모두를 가진 사람이 있다. 허준영(57) 허병원·허한방병원 원장. 그는 약사이면서 의사이자 한의사다. 요즘에는 한의대와 의대 사이의 교류가 넓어져 양·한방 복수 면허자가 국내에 100여 명이나 되지만, 허 원장처럼 약사 자격증마저 갖고 있는 이는 극히 드물다. 그를 만나 남다른 인생 경력, 양·한방 대립 등에 관한 지론 등을 들어봤다.
◇지천명 지나 한의대로
양·한방 대립의 골은 깊다. 그렇지만 일반인들에게 양·한방의 대립은 무의미할 수 있다. 덩샤오핑의 흑묘백묘론처럼 질병만 빨리, 잘 치료해 주면 '최고'가 아닌가.
허 원장은 "어떤 이유에서든 환자들의 치료가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하고 평범한 이야기. 그러나 약사, 의사, 한의사 자격증을 모두 가진 그의 남다른 경력 때문에 그의 발언은 무게감을 갖고 기자에게 다가왔다.
허 원장은 나이 50을 훌쩍 넘긴 지난 2005년에 한의사 자격증을 땄다. 본인 말대로 '미친 사람이나 하는 짓거리'를 해서 성공한 것이었다.
그가 약사 자격증을 딴 사연 또한 이채로웠다.
"문학과 시험을 쳤다가 떨어졌습니다. 재수를 하려고 생각했지만 아버님(2005년 작고)의 설득에 못 이겨 일단 시험을 치고 입학했지요."
'마지 못해' 들어간 대학이지만 힘든 수업을 따라가다 보니 재수를 할 수 있는 시간적·정신적 여유가 없었단다. 그렇게 졸업하고 약사 자격증을 따서 약국을 운영했지만 그의 관심은 다른 곳으로 돌려졌다.
"당시 약국의 경쟁이 엄청 심했죠. 밤에는 취객 때문에, 새벽에는 공장 일꾼들을 상대해야 했어요. 남들보다 더 늦게 문 닫고, 조금이라도 더 일찍 문 여는 고된 일의 연속이었지요."
그래서 그는 "더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에 1974년 경희대 의대에 편입학했다. 1978년엔 의사 면허증을 땄다. 이후 줄곧 내과 전문의로 일해 왔다. 1994년 한의사인 동생과 함께 양·한방 양진 병원을 개원한 뒤의 경험에 허 원장은 한의학을 공부해 보리라는 생각을 했다.
"양·한방 의사들 간에 보이지 않는 벽이 있었어요. 한의사들이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데 관련 지식이 없으니 이해하기도 힘들었고요."
어릴 적 아버지를 도와 한방 관련 일을 해봤고, 남동생이 한의사이다 보니 그런 관심은 결국 2000년 대구한의대 본과 1학년 편입학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한의사인 아버지나 남동생도 처음에는 반대하고 나섰다. "다 늦게 무슨 한의사 공부냐?"는 논지였다. 굳은 결심에 밀어붙인 공부였지만 가족들의 우려는 현실로 나타났다.
◇한의학 과학화 협진 지름길
"눈도 침침해서 책도 잘 안 보이고 시험 기간이면 몇 날 며칠을 밤샘 공부해야 하는데 죽겠더군요. 아내(동부 허병원·허한방병원 이사장)가 노화방지 주사도 놓아 주는 등 도와주지 않았으면 졸업하기 힘들었을 겁니다."
허 원장은 "졸업하자마자 바로 합격했으니 다행이지 떨어졌으면 다시는 도전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공부 때문에 책상에 너무 오래 앉아 있다 보니 무좀을 비롯한 여러 질환에 시달렸지만 "늙어도 학창시절은 재미있더라."는 것이 허 원장의 기억이다. "딸아이 또래의 어린 학생들과 함께 수업을 듣고 막걸리나 맥주 한 잔 할 수 있으니 힘이 나더라."고 했다.
허 원장은 이런 역정 끝에 얻은 의학 지식과 기술을 환자 치료에 접목하고 있다. 내과의로 활약하고는 있지만 양방 진료를 하면서도 한방치료법도 생각해 본다.
그는 이와 관련해 '한의학의 과학화'를 주창한다. "한방이 빨리 과학화·개념화돼야 의료 선진화가 된다."는 말이다. 그는 이웃 일본이나 중국에서는 양측이 긴밀하게 협력하고, 미국에서 '대체의학' 내지 '보완의학'이란 명칭으로 한의학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 점을 예로 들었다.
허 원장은 점점 우수한 인력이 한의학과에 몰리고 있는 점을 희망적으로 생각했다. "20, 30대 한의사들은 한·의학 논쟁에서도 지지 않을 겁니다. 젊은 세대들은 양·한방 진료 접목의 필요성에 호응하는 것 같고요. 실제로 신경외과·정형외과·재활치료 쪽에서는 이미 협진이 많이 실시되고 있지요. 대구가톨릭대병원과 대구한의대병원이 협진 체계를 구축해 진료센터와 부속병원까지 마련키로 했는데 이런 사례가 점점 더 나와야 할 것 같습니다."
허 원장은 "앞으로 한방을 더 연구하고 싶다."는 희망을 밝혔다. "양방 연구는 이미 많이 이루어졌지만 한방의 연구·발전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는 이유도 설명했다. "서양 의학으로는 해결하지 못하는 불치병을 한방을 접목해 치료하는 법을 찾아보고 싶다."고도 했다.
조문호기자 news119@msnet.co.kr
▨ 양·한방 복수 면허자 국내 100여명 활동…90년대 이후 폭증세
현재 국내에는 의사와 한의사 면허를 모두 소지한 '양·한방 복수면허자' 수가 100여 명에 이른다.
지난 2005년 8월 28일 70여 명의 복수 면허자가 주축이 돼 대한동서의학회를 창립했다. 이들은 이에 앞서 2004년 12월 복수면허인 5명의 이름으로 양·한방 통합진료를 표방하며 '동서결합병원' 개설을 요구하는 헌법소원을 제기해 지난해 말 헌재로부터 '헌법 불일치' 판정을 이끌어냈다.
당시 회장에 추대된 민병일 경희대 교수의 발표에 따르면 양·한방 복수면허자 수는 1960, 70년대 5명, 1980년대 4명, 1990년대 5명에 불과했으나, 1990년대 들어 의학 계열 간 상호 교차 편입의 문호가 개방되면서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했다. 2000년에서 2005년까지 59명이 복수 면허를 땄고, 이후에도 해마다 증가세에 있다.
조문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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