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기고] 시골의 설날

오늘날 PC방, 게임방과 노래방의 유흥장에서 기계를 상대로 소비적 쾌락에 중독되어 가는 아이들과 우리의 모습을 보면서 지난날 고향의 설날 풍습을 돌이켜본다. 고향에서는 지금도 마을 세배를 하고 윷놀이 대회를 하는지? 그리고 우리는 아파트와 전자기기 앞에서 어떻게 더불어 사는 지혜와 힘을 되살릴 수 있을지 한번쯤 생각해 봐야 할 일이다.

나는 고향을 잊을 수 없었고 고향의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시공(時空)의 추억을 생각할 때가 많다. 누구인들 다르랴만 어린 시절의 추억은 나에게 있어서 참으로 아련한 반세기의 기억 속에 활동사진 필름처럼 큰 울림으로 또렷하게 되새겨진다. 이제 며칠이 지나면 설날이다. 설날의 추억 몇 가지를 활동사진을 비추듯 여기에 되비춰보면 새로운 울림으로 나타난다.

제일 먼저 생각나는 추억은 세배 장면이다. 설날 아침에 새 옷 갈아입고 집안 어른들께 세배를 올렸다. 명절 차례를 지내고 나서는 마을 어른께 세배를 하러 다녔다. 이때 집안 어른들이 일러주시기를 어른 어느 분을 어떤 순서로 찾아뵈어라. 너무 오래 앉아있거나 서둘러 일어나지 말아라. 혹시 병석에 누워계신 분께는 절하지 말고 문병만 해라. 이렇게 예법과 실제를 어떻게 조화시켜 실행하는지를 깨닫게 해주었다. 이날은 평소 왕래가 있었던 타성씨의 안방 노인께도 세배를 가곤했다. 그러나 집안에 걱정이 있거나 우환이 있어서 명절을 쇨 형편이 못 되는 집을 피하게 하였다.

나는 어렸지만 어른들의 판단과 당부내용이 이해되고 수긍이 갔다. 특히 설날만이라도 빈부와 남녀 구별 없이 어른을 존중해서 세배하는 일이 좋다고 생각되었다. 그 시기에는 어느 집이나 세뱃돈을 주는 일이 없었다. 여느 집이나 가계 형편이 오늘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어른들은 세뱃값으로 격려와 당부의 덕담을 해주었고 단술, 떡국 등의 음식을 내놓았다. 참으로 깨닫고 느끼는 점이 많았던 아름다운 풍습이었다.

또 다른 추억은 윷놀이 장면이다. 차례와 마을 세배가 끝나면 동회관 앞마당에서 마을 사람들이 모여 윷놀이 대회를 개최했다. 반 대표를 선정하고 반별 대진표를 벽에 써붙여서 대진표에 따라 마당에 멍석을 깔면 윷놀이가 시작된다. 램프 불빛 아래에서 윷짝을 모아서 멍석 위에 던지면 윷짝이 굴러퍼졌다. 윷짝의 하나라도 멍석 밖으로 나가면 '낙방'으로 무효 처리되고 그러면 상대편은 소리를 지르며 호들갑을 떨었다. 모가 나오거나 상대의 말을 잡기라도 하면 자기편의 남녀 모두 멍석 위에 뛰어들어 춤을 추고 맘껏 소리를 질렀다. 윷판을 그리지 않고 윷말을 쓰다 보니까 시비가 나기 일쑤였다. 그래서 판마다 판관을 선정해 그가 판정을 내리고 모두가 이에 따랐다. 마지막에는 대진표의 각 이름 위에 표시한 O와 X를 세어 승부를 판정하였다. 이 얼마나 장쾌하고 멋있는 놀이이며 멋스런 잔치인가.

우리는 이처럼 설날의 마을 세배를 통해 어른을 존중하고 아이들을 생각 깊게 함으로써 남녀노소가 더불어 사는 마을 공동체의 인간관계를 예절과 정분을 통해 깨우치고 배우는 아름다운 풍속을 지녀왔다. 또 윷놀이 같은 잔치를 통해 건강하고 활달한 기상과 공동체의 정신과 힘을 길러왔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명절의 옛 풍습을 통해 지덕체 교육을 실제로 체험하였다. 우리 아이들도 설날 고향 방문과 더불어 지덕체 교육을 체험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주어야 하겠다.

황상구(안동대학교 교수/경상북도 문화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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