둥근 통나무 욕조의 우윳빛 물이 붉게 변한다. 약에 취해 의식을 잃은 어린 소년은 짙어지는 붉은 빛깔을 감지하지 못한다. 창백한 얼굴의 날선 콧날과 맑은 눈망울, 가녀린 몸매. 핏물과 한데 뒤엉킨 소년은 몸을 희생시킨 대가로 영혼의 소리를 선물받는다. 훗날 소년은 알게 된다. 그것이 카스트라토의 운명이라는 것을···.
카를로 브로스키(carlo broschi)의 일생을 그린 영화 '파리넬리'의 한 장면이다.
남성의 폐활량과 변성기를 지나지 않은 성대로 여성의 음역을 소화해 낸 카스트라토의 몸은 한낱 '악기'에 지나지 않았다. 몸은 혹독하게 도구로 이용됐다. 넓은 가슴은 소리의 울림을 자극했다. 길어지지 않은 성대는 3옥타브를 넘나드는 음역을 소화해냈다. 천상의 소리가 우연히 인간의 몸으로 들어온 순간이다. 자연을 거스른 행위가 아름다움을 갈구하는 인간을 '예술의 경지'로 올려놓은 접점이기도 했다. 영혼의 울림에 이끌린 이들은 더욱 탐욕스럽게 예술의 공간을 헤집었다. 몸은 만신창이가 됐다. 기교만 난무했다. 자연이란 섭리를 거스른 오묘한 소리는 결국 '여성'이란 이름 앞에 300년 만에 무릎을 꿇었다.
그래서였다. 소프라노 신미경, 여성으로 흔치 않게 흉성 발성을 하는 대구예술대학 겸임교수를 찾았다. 50대 초반의 나이. 그녀는 기교 가득한 절정의 소리를 지나 교감의 영역에서 청중을 대면했다. 청중이 발산하는 영혼의 소리가 그녀를 휘감아 가슴을 울리고 배를 치고 성대로 쏟아져 나왔다. 한센병 환자 시설을 방문, 노래 봉사를 하고 나온 그녀는 되레 소리를 듣고 왔다고 했다. 폐활량을 늘리고 성대를 비벼서 낸 소리가 환자들의 희망을 담아 가슴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갇혀 지내는 이들이 세상과 소통하는 유일한 방법이 제 노래였습니다. 그들의 눈빛엔 삶의 희망과 가족의 안부, 사랑하는 이에 대한 그리움 등 수많은 감정이 담겨있어요." 그녀는 쉰이라는 물리적 제한이 주는 소리의 한계를 정신의 영역으로 끌어올리고 있었다. 하늘의 뜻을 아는 나이에 그녀는 약자와 교감하는 법을 터득하고 있었다. 예술이란 이름으로 말이다.
아름다움을 찾기 위해 안간힘 쓰는 인간은 소리가 소통될 때야 비로소 음악이 되고 노래가 된다는 사실을 자주 망각한다. 몸이란 악기로 울림의 공간을 만들어 소리를 내는 것만이 예술이고 천상의 소리는 아닐 것이다. 청중의 희망과 간절함, 사랑을 온몸으로 품은 성악가의 몸이야말로 예술을 승화시킬 수 있지 않을까.
정현미기자 bori@msnet.co.kr 사진 김태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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