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지인들을 만날 때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은 TV에서 방영 중인 사극(史劇)이 실제 사실(史實)과 맞느냐는 것이다.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난처하기 짝이 없다. 필자는 사극을 그리 애청하는 편이 아니다. 볼거리는 화려해졌지만 내용이 사실과 너무 달라 눈에 거슬리는 장면이 한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 두 장면만 예로 들면 충녕대군이 고려 부흥세력에게 납치된다거나, 영조의 딸 화완옹주가 노론 대신들의 회의를 소집하고, 양자 정후겸에게 너도 왕이 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 등은 아무런 개연성도 없는 허구에 불과하다.
그러나 사극(史劇)이 사실(史實)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비난받는 것도 불합리한 것이 사실이다. 다큐멘타리가 아닌 사극과 사실은 '극(劇)'과 '실(實)'의 의미 차이만큼 다른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극(劇)은 연극, 또는 놀이라는 뜻이지만 실(實)은 참이라는 뜻으로서 허(虛)의 반대이다. 따라서 사극은 허(虛)에서 만들어 내는 새로운 창작과정인 것이다.
문제는 많은 시청자들이 사극을 사실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이 현실이고, 또 시민들의 독서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우리 사회에서 사극이 일종의 역사 교사 역할을 하고 있는 것도 현실이라는 점에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일종의 공유재산인 방송 전파로 사실(史實)과 다른 내용을 무차별로 전파하는 것은 국민들의 역사관 오도라는 심각한 문제를 낳을 수 있기 때문에 일정한 제한이 가해지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서 사극에 허용되는 상상력의 한계가 어디까지인가라는 어려운 문제가 등장하는데, 이는 예술과 외설(猥褻)의 경계만큼이나 나누기 어려운 문제이다. 이 문제를 풀기위해 역사 왜곡 논쟁이 일어난 사극과 그렇지 않은 사극을 비교해보면 하나의 원칙을 찾을 수 있다. 검증된 원작이 있었던 소설을 사극화한 것이냐 아니냐 하는 점이다.
조선의 삼대 재사(才士)로 불렸던 벽초 홍명희는 대하소설 '임꺽정(林巨正)'을 썼고, 현대의 황석영은 '장길산'을 썼는데, 이 두 작품은 모두 사극으로 방영되었다. 소설 '임꺽정'과 '장길산'은 모두 실록과는 다르다. 소설은 그들을 의적(義賊)으로 그리고 있지만 현전하는 사료는 다르다. '명종실록'은 양주(楊州) 백정 출신의 임꺽정을 명종 14년(1559)부터 명종 17년(1562)까지 황해도를 중심으로 평안·경기·강원 지역에서 활약하다가 체포되어 사형당한 '도적의 괴수(賊魁)'라고 묘사하고 있다. '명종실록' 14년(1559) 4월 21일자는 임꺽정이 자신을 신고한 백성의 배를 갈라 죽였다고 전하고 있다. 실록 상으로 그는 의적이기보다는 신고한 백성들을 보복 살해하는 잔혹한 도적이었다.
'숙종실록'도 장길산을 도적의 괴수라고 규정짓고 있다. 조선후기 실학자 성호 이익(李瀷)은 조선의 3대 도적을 홍길동?임꺽정?장길산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장길산만 유일하게 체포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관찬기록에서 도적의 괴수에 불과한 이들을 소설은 의적으로 재창작했지만 백성들의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실록에서 기록할 수 없는 역사의 이면을 담았기 때문이다. '명종실록'의 사관은 "도적이 성행하는 것은 수령의 가렴주구 탓이며, 수령의 가렴주구는 재상이 청렴하지 못한 탓이다."라고 비판하고 있다. 심지어 '명종실록'의 사관이 "대도(大盜)가 조정에 도사리고 있는 셈"이라고까지 비판하고 있듯이 이들을 도적으로 내 몬 것은 사회구조의 문제점이 한몫을 했던 것이다.
홍길동이 활동했던 연산군 때나 장길산이 활동했던 숙종 때는 모두 조정의 큰 혼란기였다. 홍길동은 심지어 평안도 우후(虞候)까지 역임한 당상관 엄귀손(嚴貴孫)과도 연결되어 있었다. 지배자의 입장에서 기술한 '실록'에는 나타나지 않는 역사의 이면이 '의적'일 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소설을 원작으로 만든 사극이 문제가 된 경우는 찾기 어렵다. 역사왜곡 논쟁이 일었던 사극들은 예외 없이 이런 원작이 없는 가운데 시나리오 작가와 담당 PD 몇 명이 내용과 제작까지 전담했던 작품들이라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시청률에 목을 매는 한국 방송의 경쟁 구조가 역사 왜곡 사극을 만드는 주범인 셈이기 때문이다.
더 이상 사극이 역사왜곡 논쟁의 한복판에 있지 않으려면 이런 사극 제작 구조가 획기적으로 바뀌어야 한다. 그래야 시청률을 위해 역사 사실까지 마음대로 바꾸는, 역사를 빙자한 공상드라마를 실제 사실로 믿는 그릇된 현실을 시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덕일(역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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